항목 ID | GC073001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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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利里 |
영어공식명칭 | Namni-ri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남리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소정 |
개설 시기/일시 | 1914년 -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남리리 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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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리리 -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남리리 | |
성격 | 법정리 |
면적 | 2.384㎢ |
가구수 | 595가구 |
인구[남/여] | 1,138명[남자 531명|여자 607명] |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남리(南利)는 고려 때부터 남리(南里)로 칭하고, 압리(鴨里)[‘앞리’에서 파생된 말]라고도 불렀다. 남(南)은 따뜻하고 풍요로움을 일컬으며, 리(利)는 하늘이 지니고 있는 4가지 덕인 원형이정(元亨利貞)에서 의로움의 조화나 만물이 이루어지는 가을을 뜻한다. 그러므로 남리는 따뜻하고 풍요로움이 조화롭게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형성 및 변천]
본래 해남군 황원면 지역에 속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시등리, 신동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해남군 황산면 남리리로 개설되었다. 현재 남리마을, 시등마을, 관두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해남 3개 역 중 하나인 남리역이 있던 곳으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1486]의 해남현 조에 의하면 전라우도 벽사도제방에 딸린 소로역으로 해남현 서쪽 35리[약 13.75㎞]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남리마을은 고려 때 승라주 역승(驛丞)에 속한 것으로 보아 마을 형성 시기는 600여 년 전으로 볼 수 있다. 또 남리역은 『동국여지승람』에 해남 3역의 하나로 나타나고 있고,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1432] 전라도 나주목 영암군 편에는 “옛날 남리역이 있었는데 왜구로 인해 없어졌다.”라는 기록이 있다. 입향조는 조선 중종 때 청주한씨 형제가 내려와서 한 사람은 진도로 가고, ‘방(方)’은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호구총수(戶口總數)』[1789]에는 남리리와 시등리는 황일면에 속한 마을이었다. 시등마을은 『호구총수』에 황일면 장등리(場嶝里)로 나타나고,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1770]에도 “황원 남이장 3일 개시”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시장이 있었던 것과 마을이 오래전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장이 서게 되어 마을을 이루게 되었으며, 1914년 황원면과 산일면을 병합한 황산면사무소가 자리하고 주변에 장이 서게 되어 차츰 큰 마을이 되었다.
[자연환경]
남리리는 논과 들이 넓은 평야 지역이고, 남쪽에 당산이 있다.
[현황]
남리리(南利里)는 북쪽으로 연당리, 우항리, 동쪽으로 우항리, 남쪽으로 외입리, 서쪽으로 연당리와 접하고 있다. 2018년 10월 31일 현재 면적은 2.384㎢이고, 남리리, 시등리, 관두리의 3개 행정리에 595가구, 1,138명[남자 531명, 여자 607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주 생업은 농업과 상업이며, 농업은 주로 쌀농사를 짓고 있으며, 농업용수는 고천암과 금호호 물을 주로 사용한다. 축산업을 하는 농가도 있다. 시등마을에는 약 130여 가구가 상업을 하고 있다. 또한 남리리에는 교육기관으로 황산초등학교가 있다. 현재 남리5일시장이 전통 시장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남리리 가운데 아래쪽으로 국도 제18호선이 동서 방향으로 비스듬히 지나간다.
구한말 없어진 남리역은 삼지원으로 가는 관리들이 쉬어 가는 숙소가 있었고, 동학농민운동 당시 우수영을 공격하기 위한 동학군의 집결지였다. 수령 300년의 보호수[지정 번호 15-14-11-2]인 이팝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임과 동시에 마을의 전통과 역사를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