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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773
한자 張柱文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혜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6년 1월 13일연표보기 - 장주문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9년 6월 9일 - 장주문 수원청년동맹 집행위원으로 선정됨
활동 시기/일시 1930년 4월 9일 - 장주문 경기도 수원군 양감면 용소리[현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용소리]에 대화의숙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30년 4월 25일 - 장주문 신간회 수원지회 집행위원이 됨
활동 시기/일시 1930년 10월 24일 - 장주문 '수원 격문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됨
활동 시기/일시 1931년 5월 3일 - 장주문 수원경찰서 서원에게 검거됨
활동 시기/일시 1931년 11월 23일 - 장주문 수원농조 집행위원으로 소작쟁의와 관련하여 체포됨
활동 시기/일시 1933년 3월 28일 - 장주문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송치됨
활동 시기/일시 1945년 12월 - 장주문 수원군 양감면 인민위원장 역임
몰년 시기/일시 미상 - 장주문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20년연표보기 - 장주문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경기도 수원군 양감면 용소리[현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용소리] 579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수원청년동맹 집행위원

[정의]

경기도 화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장주문(張柱文)[1906~?]은 1906년 1월 13일 경기도 수원군 양감면 용소리[현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용소리] 579번지에서 태어났다. 조선청년동맹은 조직 원칙에 의하여 군마다 단일의 청년동맹을 두기로 하였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1929년 6월 9일 오산청년동맹 임시총회에서 조직체를 변경하기로 하고 수원청년동맹으로 개칭하였다. 장주문은 수원청년동맹의 집행위원이 되었고, 약 두 달 뒤인 1929년 8월 25일에 열린 제1회 수원청년동맹 정기대회에서 집행위원과 재무부원을 맡게 되었다.

장주문은 지역 아동의 교육에도 관심을 가졌다. 수원군 양감면 용소리[현 화성시 양감면 용소리]에 거주하는 유지 청년들과 함께 무산(無産) 아동을 교육시키기 위한 기관을 만들기로 하고 양감장학회에서 건물을 기부받았다. 1930년 4월 9일 건물 개축을 완공하고 대화의숙(大化義塾)을 설립하였다. 대화의숙은 주·야학을 합하여 200여 명의 달하는 학생을 두었다.

1930년 4월 25일에는 신간회 수원지회 집행위원이 되었다. 1930년 10월 24일 장주문은 수원청년동맹 양감지부 집행위원장으로, '수원 격문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다. 이듬해인 1931년 5월 3일 어린이날 행렬을 할 때, 장주문을 비롯한 이원섭·구직회·김시중·한중석 등이 체포되었는데, 어린이날을 '무산소년데이'로 전환하여 다른 운동을 도모하였다는 이유였다. 5월 9일에 석방되었다. 장주문은 수원농조 집행위원으로도 활동하였는데, 1931년 11월 23일 양감면에서 일어난 소작쟁의와 관련하여 검거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송치되었다. 1933년 3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1945년 12월 무렵 장주문양감면 인민위원장을 맡았다는 것이 확인되지만, 해방 이후 그의 행적 및 사망과 관련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상훈과 추모]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사실이 확인되어 202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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