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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695
한자 白樂烈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철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5년 12월 20일연표보기 - 백낙열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4년 - 백낙열 동학농민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백낙열 장안면 수촌리 이장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일 - 백낙열 서울 3·1 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3일 - 백낙열 장안·우정면 독립만세운동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37년 1월 4일연표보기 - 백낙열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2년연표보기 - 백낙열 건국포장 추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우정면 일대의 3·1운동에 참여한 화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백낙열(白樂烈)[1865~1937]은 1865년 12월 20일 수원군 장안면[현 화성시 장안면] 수촌리에서 태어났다. 1884년 동학에 입교하였으며, 1894년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수원 접주 고석주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1910년에 천도교 남양교구 금융원이 되었으며, 남양교구 강습소를 설치하는 등 포교 활동에 힘썼다. 백낙열은 3·1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던 1919년 당시 장안면(長安面) 수촌리(水寸里)의 이장이었다. 백낙열은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에 참여하였으며, 4월 3일에는 장안면 석포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소식을 전해 듣고 직접 동민들의 시위 참여를 독려하며 시위대를 규합하였다. 백낙열은 시위대를 이끌며 우정면사무소를 파괴하고, 화수리 경찰관주재소 습격에 앞장섰다. 화수리 경찰관주재소 경관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가 시위대에 의해 처단당하자, '남산에 가서 웅거하며 대항하자'고 말하였으며, 체포를 피해 충청도 계룡산에서 3년 간 은거하였다. 이후 고주리 천덕산 천덕바위로 옮겨와, 10년 간 신분을 숨기고 은거하다가 1937년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장안·우정면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공적이 확인되어 2002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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