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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774
한자 朴勝極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혜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9년 11월 2일연표보기 - 박승극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8년 - 박승극 배재고등보통학교 수료
활동 시기/일시 1927년 8월 3일 - 박승극 반도청년(半島靑年) 신임위원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28년 12월 16일 - 박승극 신간회 수원지회 제3회 정기대회에서 간사로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29년 4월 23일 - 박승극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수원지부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29년 6월 - 박승극 「농민」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30년 3월 26일 - 박승극 수원기자동맹 창립대회 개최
활동 시기/일시 1931년 2월 20일 - 박승극 수진농조위원회(水振農組委員會) 신임 집행위원으로 선정
활동 시기/일시 1946년 2월 - 박승극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48년 8월 - 박승극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출석
몰년 시기/일시 미상 - 박승극 월북
출생지 경기도 수원군 양감면 정문리[현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정문리] 348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경기도 수원군 양감면 정문리[현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정문리] 348지도보기
성격 사회주의 운동가|문학가
성별

[정의]

경기도 화성 출신의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문학가.

[가계]

박승극(朴勝極)[1909~?]은 1909년 11월 2일 경기도 수원군 양감면 정문리[현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정문리] 348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28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수료하였다. 1926년 12월 19일 창립한 반도청년회(半島靑年會)는 1927년 8월 3일 회장제에서 집행위원제로 체제를 개정하였는데, 이때 반도청년회 신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8년 12월 16일에는 신간회 수원지회의 간사로 선임되었고, 이듬해인 1929년 4월 7일에는 신간회 수원지회 서무재정부를 맡게 되었다. 1929년 4월 23일에는 조선프롤레탈리아예술동맹 수원지부를 설립하고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1929년 6월에 조직된 수원청년동맹의 집행위원장으로 선정되었다.

박승극은 조선일보 수원지국의 기자로서 1930년 3월 26일 수원기자동맹 창립대회를 열고 조사부원으로 선임되었다. 1931년 2월 20일에는 수진농조위원회(水振農組委員會)의 신임집행위원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박승극은 일제의 예비 검속 대상이 되어, 1931년 11월 23일 수원군 양감면 황구지 소작쟁의를 발단으로 일어난 수진농민조합 간부 검거사건으로 수원경찰서 고등계의 취조를 받게 되었다. 1932년 1월 6일 사건은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국되었고, 박승극·남상환·장주문·이원섭·김영상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공판에 회부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1933년 3월 28일 무죄를 선고받았다.

박승극은 소설가 및 비평가로도 활동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농민」·「색등 밑에서」·「떡」 등이 있다. 1930년대 중반에는 창작 방법 논쟁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비평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해방 후인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에 참여하였고, 경기지부 선전부장 및 중앙위원을 역임하였다. 1948년 8월에는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출석하여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전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후 행적 및 사망과 관련하여 알려진 바가 없다.

[저술 및 작품]

주요 작품으로는 「농민」[『조선지광』, 1929. 6.], 「재출발」[『비판』, 1931. 7~8.], 「그 여자」[『신인문학』, 1935. 8.], 「색등 밑에서」[『신인문학』, 1935. 10.], 「항간사」[『신인문학』, 1935. 12.], 「화초」[『신조선』, 1935. 12.], 「추야장」[『신인문학』, 1936. 1.], 「풍경」[『신조선』, 1936. 1.], 「백골」[『비판』, 1936. 9.] 등이 있고, 광복 직후 발표한 「떡」[『문학』, 1946. 11.], 「길」[『문학평론』, 1947. 4.], 「별도 성내다」[『신조선』, 1947. 6.] 등이 있다. 1938년에는 수필집 『다여집[多餘集]』을 간행하였다.

주요 평론으로는 「푸로작가의 동향」[『조선일보』, 1933. 9. 2~7.], 「최근의 푸로시단」[『조선일보』, 1933. 9. 30.], 「농촌소설집」[『조선일보』, 1933. 12. 10~14.], 「문예와 정치」[『동아일보』, 1934. 6. 5~9.], 「리얼리즘소고」[『조선중앙일보』, 1935. 3. 11~30.], 「조선문학의 재건설」[『신동아』, 1935. 6.], 「예술동맹해산에 제하야」[『신조선』4, 1935. 8.], 「창작방법의 확립을 위하여」[『조선중앙일보』, 1935. 12. 14~22.], 「그의 인간사상과 작품 문장에 대하여-이기영검토」[『풍림』, 1937. 5.] 등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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