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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개우물의 유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1311
한자 - 由來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원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1980년 10월 4일 - 「여개우물의 유래」 안익승으로부터 채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1981년 6월 30일 - 「여개우물의 유래」 『한국구비문학대계 1-5: 경기도 수원시·화성군편』에 수록
관련 지명 여개우물 -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해문리 돌안말 지도보기
채록지 경기도 수원시 교동
성격 설화
주요 등장 인물 안문경|이서방
모티프 유형 지혜담|열녀담|지명유래담

[정의]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해문리 사람들이 전란 중에 섬으로 피신할 때 함께 떠나지 못한 두 자매가 우물에 빠져 자결한 이야기.

[개설]

경기도 화성지역에서는 사람들이 섬으로 피난을 나갈 때 건너간 갯벌 길을 부뚜감이나 황새감 또는 개미다리라 부른다고 하였다. 여기서 부뚜는 타작마당에서 티끌·쭉정이·검부러기 등을 바람에 날려 곡식을 고르는데 쓰였던 농기구로 풍석(風席)이라고도 한다. 부뚜는 왕골이나 새끼줄로 엮어 만들어진 돗자리 형태로 양쪽 끝에는 부뚜손이라 하는 나무를 덧대어 잡고 흔들었다. 이렇게 바람을 일으켜 잡티와 낟알을 분리하는 일을 부뚜질 또는 풍석질이라고 한다. 부뚜는 폭이 40~50㎝, 길이는 1.5~2m인데, 이 부뚜의 폭에 빗대어 갯벌 길의 너비를 설명한 것이다. 황새감은 황새가 걸어 건널 수 있는 깊이의 갯벌이라는 뜻이다.

개미다리마산포의 끝과 어섬[어도]를 잇는 다리이다. 간척 이전 어섬마산포는 1km정도의 가까운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바다로 인해 배로 건너거나, 썰물 때 열리는 갯벌을 걸어 다녀야 했다. 1924년에는 자선가 김주용(金周容)이 징검다리를 놓아 고포리에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는데, 소와 사람은 걸어서 이동이 가능하였으나 차량의 이동은 불가하였다. 이러한 통행의 불편을 타개하고자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1968년에서 1973년 사이 다리를 놓았는데, 이때 당시 주민들이 개미처럼 달라붙어서 만들었다고 하여 개미다리라 불렀다. 후에 일대는 모두 간척이 되어 육지가 되었고 개미다리도 일반 도로가 되었다. 개미다리의 위치는 마산포쪽인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고포리 산 213에서 어섬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고포리 787-8 사이에 놓인 길에 해당한다.

[채록/수집 상황]

1981년 6월 30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 1-5: 경기도 수원시·화성군편』에 「여개우물의 유래」라는 제목으로 68~71쪽에 걸쳐 수록되어 있다. 「여개우물의 유래」는 1980년 10월 4일 경기도 수원시 교동에서 채록되었다. 구연자는 안익승[남, 62세]이며 조사자는 성기열, 김용범이다. 한편 『한국구비문학대계』 설화의 제보자는 우물의 이름을 여계우물여계정, 또는 여이정으로 불렀으며, 현지에서 여계정이라 쓰여 있는 것을 직접 보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조사자는 제목을 여개우물로 표기하였고 연유를 따로 밝히지 않았다. 우물의 소재를 알 수 없어 확인이 어렵지만, 작품의 내용에 따라 설화의 제목에 사용된 우물 이름은 여개우물에서 여계우물로 고쳐 부르는 것이 적합하다. 그리고 1990년 출간된 『화성군사』하에는 「예계우물」이라는 제목의 자료가 수록되어 있는데 제보자 정보가 생략되어 있다. 이 자료의 제목인 ‘예계우물’은 여계우물의 발음 그대로의 표기 또는 표기상의 오류로 보이므로, 제목상의 우물명은 ‘여계우물’이 적합하다.

[내용]

옛날 병자호란이 나서 며칠 내 마을로 적들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마도면 해문리 돌안말 마을에 퍼졌다. 송산마도, 서신 일대 사람들은 바다를 건너 섬 쪽으로 피난을 갔다. 안씨 집성촌이 있는 돌안말에서 아들 일곱을 두고 살던 안문경의 집안도 피난을 가게 되었다. 안문경이 아들 칠형제를 데리고 마을을 나서는데 건너 마을에 사는 이서방이 병환 중인 노모를 돌보느라 자신은 피난을 갈 수 없다고, 자신의 두 딸을 데리고 가달라고 간청을 하였다. 이에 안문경은 “난리판에 내 자식도 칠형제나 되어서 걱정인데, 어떻게 남의 자식까지 데리고 가느냐”고 하였고, 이서방은 “아무래도 남자는 피해가 덜 하지 않겠느냐, 처녀들이 욕을 당하면 어떻게 하냐?”고 하였다. 안문경은 “딸 보다 아들이 더 중요하지 무슨 소리냐? 칠형제를 데리고 가는 것도 죽을 지경이다. 남의 딸자식도 귀중하겠지만 데리고 못 가겠다.”하고 거절하였다. 팽나무재 아래에서 피난길 동행을 거부당한 집 두 자매는 “이왕 욕을 당할 바에는 그냥 미리 빠져 죽자.”고 하며 돌안말 마을 우물에 빠져 죽었다. 마을에서는 두 자매가 빠져 죽은 우물은 경계 계자를 써서 여계우물·여계정이라 부르거나 여이정(女二井)이라 불렀고 더 높은 위치에 새로운 우물을 파서 사용하였다. 한편 피난을 가던 사람들은 바다를 건너 섬 쪽으로 가야하는데 바다는 이미 밀물이 들어차고 있었다. 바닷물이 찼는데 배를 탈 수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황새가 내려와 바닷물 속을 성큼성큼 걸어갔다. 황새가 걸어갈 정도면 깊이가 얕을 것이므로, 사람들은 황새가 가는 데로만 따라 걸어갔고 결국 어섬에 다다랐다. 걸어서 건너간 바닷길은 부뚜 폭만큼의 너비라 하여 부뚜감이라고도 하고, 황새를 따라 걸어간 길이라 하여 황새감이라고도 하였다. 새마을운동 때 육지 마산포 쪽과 어섬을 잇는 다리를 건설하였는데, 이를 개미다리라고 불렀다.

[모티프 분석]

「여개우물의 유래」는 두 개의 모티프로 이어져 있다. 하나는 피난 가는 길에 만난 두 자매가 부탁을 거절하자 자결을 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피난을 가던 사람들이 황새를 따라 바다를 건너 섬에 갔다는 것이다. 전자는 여성의 정조와 순결을 강조하던 전통사회의 유교적 규범 아래 능욕을 막고자 자결한 두 자매의 죽음을 기리는 열녀담이자 우물 이름 유래담에 해당한다. 후자는 황새가 바닷물을 건너는 것에서 얕은 물이라는 것을 추측하여 피난길의 위기를 극복한 지혜담이다. 이때 황새는 위기에 봉착한 사람들에게 바다를 걸어서 건널 수 있는 길의 위치 정보를 제공해줌으로써 섬으로 건너갈 수 있게 인도해주는 작중의 조력자이다.

한편 『한국구비문학대계』 구연 내용에서 제보자는 여계우물의 ‘계’ 자를 한자로 ‘경계 계자’를 쓴다고 하였다. 이에 조사정리자는 ‘경계 계자’에 해당하는 한자를 계(界)자로 이해하여 여계정(女界井)이라고 표기하였다. 그런데 계(界)자는 ‘지경 계자’로 불리는 것이 일반적이고, 이때 한자의 뜻을 새기는 훈은 지경에 해당한다. 제보자는 구술 상에서 ‘경계 계자’라 하였으므로, 이는 ‘경계할 계(戒)’ 또는 ‘경계할 계(誡)’자에 해당할 수 있다. 과거 유교적 이념 하에서는 여성의 생활 및 처신 등에 관한 규범과 계율(誡律)을 여계(女誡)라 하였고, 결혼 이후 여성의 삶에 대한 훈계 내용을 담은 계녀가(戒女歌) 유형의 규방가사를 전했다. 이러한 맥락은 정조를 지키고자 자결한 두 자매의 우물 이야기와도 통한다. 흔히 지명 유래 전설에서 지형 지물의 이름을 지어 부를 때 내용과 주제를 대표하는 단어를 채택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여계우물을 한자로 표기할 때 계(戒)자나 계(誡)자로 표기했을 가능성도 있다. 우물의 소재를 알 수 없어 정확한 확인은 어렵지만 정확한 한자 병기를 위해 추가 조사를 통한 재고가 필요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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