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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조 이야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1317
한자 正廟朝-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원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1980년 2월 11일 - 「정묘조 이야기」 강성직으로부터 채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1981년 6월 20일 - 「화산리 삼괴 이야기」 『한국구비문학대계 1-5: 경기도 수원시·화성군편』에 수록
관련 지명 융건릉 -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지도보기
채록지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 괘랑3리 지도보기
성격 설화
주요 등장 인물 정조|박상의
모티프 유형 효행담|보은담|신이담

[정의]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 융건릉정조대왕에 관련하여 전해지는 이야기.

[채록/수집 상황]

1981년 6월 20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 1-5: 경기도 수원시·화성군편』에 「정묘조(正廟朝)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256~265쪽에 수록되어 있다. 「정묘조 이야기」는 1980년 2월 11일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 괘랑3리에서 채록되었으며, 구연자는 강성직[남, 72세], 조사자는 성기열, 김응식, 최명동, 김용범이다.

[내용]

사도세자의 아들이 정묘조가 되고 나서 나라 지관으로 제일 유명한 박상의를 대동하여 아버지의 묘소를 살펴보러 갔다. 박상의는 사도세자의 묘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였고, 정조는 좋은 묘자리를 새로 잡으라고 하였다. 강원도 방면을 모두 다녀도 좋은 능자리가 없자 화성 방면으로 가보자 하여 정조와 박상의가 동행하여 길을 나섰다. 동작동 나루를 건너 과천으로 넘어오는데 산꼭대기 위에서 장사를 지내는 떠꺼머리총각이 있었다. 묘자리가 어떤지 궁금하여 가서 봤는데, 지관 박상의가 보기에는 한 금정(金井)[무덤을 만들 때, 구덩이의 길이와 너비를 정하는 데 쓰는 나무틀]만큼만 올려서 묘를 쓰면 아주 좋은 대지인데, 내려써서 아쉽다고 하였다. 이에 정조가 총각을 불러 “한 금정만 올려 쓰면 좋은 자리인데 왜 한 금정을 내려 썼느냐?, 한 금정을 올려 묘를 써라.”고 알려주었다. 그런데 총각은 “못 쓰겠습니다.”라고 하였고 정조가 “왜 그러냐?”고 물으니 “저는 안산에 사는 박씨 총각으로 그간 머슴살이를 하며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기로, 남은 돈이 없어 동네 사람들의 원조로 그나마 산소를 쓰는 건데, 한 금정 더 올려다 써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를 정조가 안타까이 여겨 쌀 열 가마와 벼 스무 필을 하사해주고 “어머니의 묘를 한 금정 올려서 모시라.”고 하였다. 그러고서는 이 묘자리를 잡은 지관을 불렀는데, 시골의 홍씨 지관이었다. 정조는 홍씨 지관에게 “왜 한 금정 낮은 여기다 묘자리를 잡아주었느냐?”고 물었는데, “모르시는 말씀이올시다. 여기는 오시(午時) 하관에 사시(巳時) 금시발복하는 자리올시다.”라고 하였다. 정조가 금품을 하사했으니 그 발복의 효과가 맞았다. 이에 시골 홍씨 지관과 박상의 지관을 모두 대동하고 묘자리를 찾았다. 그렇게 해서 잡은 사도세자의 융릉 묘자리는 소가 누운 와우(臥牛)형 명당으로 이에 맞게 주변을 소머리 형상으로 만든 것이다. 다음으로는 본인 정묘조의 묘자리를 찾았는데 원래는 지금의 용주사 자리가 원래 정묘조의 묘자리였다. 그런데 나라에 효자가 너무 극심하면 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워진다고 해서 그 자리로 신라 때 지어진 암자를 내려 절을 새로 지었는데, 내려지은 절을 용주사라 하고 우리나라가 360골이라 하여 360칸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용주사에 360 섬지기의 땅을 주어 절을 부양하였다. 정묘조의 무덤인 건릉의 묘자리는 융릉 옆의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연화부수(蓮花浮水)형 명당으로, 괘랑리 남산 마을 근처 봉우리를 연화봉(蓮花峯)으로 삼고 주변에 만년제 방죽을 만들아 물이 있게 하였다.

효심이 지극했던 정묘조는 아버지 산소에 참배하러 자주 행차하였다. 이에 ‘모처럼 능참봉을 하니 한 달에 거동이 스물아홉 번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원래는 편하게 지내야할 능참봉이 정묘조의 잦은 방문 때문에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수원 능참봉은 한 끼에 닭이 한 마리씩이다’라는 말도 있는데, 능참봉을 하는 집은 한 끼에 닭 한 마리씩 해먹을 정도로 형편이 좋았음을 말한다. 이는 정묘조가 자기 아버지 산소를 위해서 묘를 관리하는 능참봉에 대해 그만큼 잘 대우해줬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 능참봉에 대한 이야기가 전한다. 하루는 추레한 행색의 과객이 능참봉을 찾아와서 자신이 관상도 잘 보고 예지도 잘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능참봉의 관상을 보더니 “당신은 앞으로 사흘 뒤에 오사(誤死)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에 왜 오사를 하느냐고 물으니 계속 사흘 뒤에 오사할 거라는 말만 하였다. 그래서 살 도리가 없겠느냐고 물으니 “좋은 유지(油紙)를 사뒀다가 사흘 뒤 저녁을 먹은 뒤 비가 오기 시작하면 나랏님 산소에 상돌 밑에 유지를 덮고서 빳빳하게 드러누워야 살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흘 뒤 능참봉은 과객이 시키는 대로 하였다. 같은 시각 정묘조는 뇌성벽력을 하며 소낙비가 내리니 아버님 산소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닭 한 마리 씩이나 주며 산소를 잘 지키라고 하였는데, 과연 능참봉이 산소를 잘 지키고 있을지, 아니면 방에서 잠만 자고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정묘조는 자객을 보내며 “능참봉의 거동을 확인하고 방에서 자고 있거든 무조건 모가지를 뚝 잘라서 오라.”고 명하였다. 자객이 재실 앞에 가니 능참봉이 없어 산소로 가보니 유지를 덮고서 산소를 지키고 있어 살려주었다.

융릉 근방에 살았던 반남 박씨 집안과 정묘조에 관련한 일화도 있다. 정묘조화산에 모신 아버지 산소를 참배하고 올라가는 길에 원두막을 처음 보게 되었다. 정묘조는 원두막이 무엇인지 궁금하여 타고 가던 말을 버드나무에 매어 놓고 원두막으로 올라갔다. 원두막에는 반남 박씨 집안 박서방이 참외밭을 지키고 있었다. 박서방이 정묘조를 보고서 보통 인물이 아닌 것 같아 참외 한 개와 밀개떡 한 쪽으로 대접하였다. 정묘조는 시장하던 차라 맛있게 먹은 후에 어디 사는 누구인지 물었는데, 골반제에 사는 박서방네라고 하였다. 이에 정조가 참외랑 개떡을 얻어먹고 반남 박씨들에게 벼락 감투를 내려줬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밖에도 정묘조융릉을 조성할 때 신경을 많이 썼다는 일화가 더러 있다. 정묘조는 아버지 산소를 쓰고 소나무를 빽빽하게 심고 입산을 금지하여 소나무가 쭉 곧게 자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래서 소나무가 모두 곧은 수형으로 예쁘게 자랐다. 그런데 한 때 소나무에 송충이가 번져서 소나무를 자꾸 갉아먹자 ‘우리 아버지 산소를 위해서 조성한 이 소나무를 내가 얼마나 아끼는데 네가 이렇게 갉아먹느냐.’ 하는 마음으로 송충이 세 마리를 입으로 깨물어서 버렸다. 그리고 나서 하룻밤이 지나고 나니 모든 송충이가 싹 없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 다른 일화로는 능산에 가면 취나물, 고사리 등 나물이 상당히 많았는데, 나물을 하던 사람들이 배가 고파서 쭉쭉 올라가는 솔싹을 꺾어서 빨아 먹기도 하였다. 그리고 연이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솔가지를 계속 꺾으니 나무에 송진이 자꾸 생기고 중절이 만들어졌다. 이에 정묘조는 “콩을 먹고 소나무를 꺾지 말라.”는 의미로 콩을 볶아 봉지로 묶어 소나무에 매달아 두었다. 정조가 그정도로 애지중지 키웠던 소나무인데 8·15 해방되기 2~3년 전에 일본 사람들이 뱃목으로 베어 가지고 갔고, 또 남은 한쪽 편 나무는 6·25 전쟁 때 인민군들이 베어서 뱃목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한참 동안 나무가 베어졌는데, 재실 뒤에 있던 나무들은 올해 논 서 마지기 하고도 안 바꾼다는 곧게 자란 거목이었는데 많이 없어졌고, 남산 밑 차서방네 마을 근처 연화봉 고개 너머에 있던 나무는 속리산의 유명한 소나무만큼 큰 아름드리 나무로 줄기는 쭉 곧게 솟았고 가지는 넓게 퍼진 대단한 나무라 하여 임금이 벼슬을 내려 옥관자 붙은 나무라 불렀는데 베어져서 없어졌다.

[모티프 분석]

「정묘조 이야기」는 총 다섯 개의 이야기가 연속하여 포함되어 있다. 첫째로는 나라 지관 박상의와 시골 지관 홍씨와 함께 융건릉의 묘자리를 잡은 것이다. 둘째는 정조의 잦은 능행차로 능참봉이 고생을 한다는 속언에 관련하여 비가 오자 능참봉이 산소 관리를 잘 하고 있는지 시험하느라 정조가 자객을 보냈는데 한 관상가의 도움으로 죽음의 위기를 넘긴 것이다. 셋째는 일반인 차림으로 능행차하던 정조에게 참외와 개떡을 대접한 반남 박씨 집안이 벼락 감투를 받았다는 것이다. 넷째는 융릉에 번지던 송충이를 정조가 깨물어 죽이자 다른 송충이들도 사라졌다는 이야기이다. 다섯째는 먹고 살기 힘든 백성들이 소나무 가지와 솔싹을 자꾸 꺾자 정조가 콩볶개를 매달아 따먹게 하여 대신 소나무를 곧게 크게 잘 키웠다는 이야기이다. 정조에 관련한 인물전설로 실존 인물인 지관 박상의가 함께 등장하여 풍수담 내용을 풍성하게 한다. 그리고 시골 지관 홍씨나 능참봉의 과객 같은 이인이 등장하여 지술과 관상의 뛰어난 재주를 보여준다. 지나가던 나그네인 줄 알고 베푼 대접의 선행이 벼락 감투라는 보상으로 돌아오는 보은담도 있다. 송충이를 씹어 없앤 일화는 정조대왕의 지극한 효심에 따른 이적이라는 신이담이고, 콩볶개를 매달아 백성과 소나무 모두를 지킨 이야기는 정조대왕의 성군과 효자로서의 면모를 모두 보이는 인물전설의 효행담으로서의 성격을 나타낸다.

[참고문헌]
  • 성기열, 『한국구비문학대계』 1-5: 경기도 수원시·화성군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1)
  • 한국민속대백과사전(https://folkency.nfm.go.kr)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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