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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덕리 남원 윤씨 집성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865
한자 千德里南原尹氏集姓村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천덕리 회덕 마을
집필자 최성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597년 - 남원 윤씨 윤만동 천덕리 회덕 마을 입향
성격 집성촌

[정의]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천덕리에 있는 남원 윤씨 집성촌.

[명칭 유래]

1789년 『호구총수』에 능주목 동면 회덕리, 1867년 『대동지지』에 능주목 주내면, 1895년에 나주부 능주군 동면, 1896년에 전라남도 능주군 동면, 1912년 『지방 행정 구역 명칭 일람』에 능주군 회덕면 회덕리로 나온다. 1913년 화순군 회덕면 회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회덕리와 천년동을 합하여 화순군 능주면 천덕리로 개편되었다. 회덕 마을은 큰 덕을 품는다는 뜻으로 회덕이라 했다고 전한다.

[형성 및 변천]

윤만동(尹萬東)[1541~1604]을 입향조로 하여 세대를 이어오는 화순군 능주면 천덕리남원 윤씨 현령공파[시위공파] 집성촌이다. 1597년(선조 30) 무렵 윤만동이 남원에서 임진왜란 시 거병한 의병으로 이곳까지 왔다가 왜란 후 진주 정씨와 혼인 후 입향하여 정착하였다. 자는 회일(會一)이고 호는 해은(海隱)이다. 지순창군사 윤처관(尹處寬)[1407~1465]의 후손이다. 글을 읽고 천리를 연구하여 여러 경전을 통달하였다. 윤리를 좋아하고 선비다운 일을 숭상하여 그 지방 사람들이 의지하였다. 임진왜란 때 종형 윤대표(尹大豹)와 의병을 모집하였다. 군량을 구하는데 많이 부족하여 집에 쌓여 있던 전곡을 형이 전투하는데 필요한 군량미로 내주었다. 여러 차례 전과를 올렸지만 때가 불리함을 보고 남으로 내려와 해망산에 은거하여 후학을 훈육하였다.

윤상석(尹商錫)[1662~1739]의 자는 성원(聖源)이고 호는 남은(南隱)이다. 학문을 독실히 배우고 힘써 행하였다. 효도로써 부모를 섬기고 은혜가 사람들에게 미쳤다. 사서육경을 관통하니 일세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윤일주(尹壹周)[1764~1843]의 자는 일첨(一瞻), 호는 봉남당(鳳南堂)이다. 남은 윤상석의 증손이다. 성품은 온화하고 재식은 영민하였으나 본래부터 지조가 있어 과거의 뜻을 두지 않고 경사를 힘써 공부하였다.

윤필영(尹必榮)[1786~1857]의 자는 상집(相集)이고 호는 경재(敬齋)이다. 풍채와 외모가 남달랐다. 어려서부터 특이한 지조가 있었고 스승에게 글을 배울 때에 글을 지으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놀랄 정도였다. 마침내 큰 그릇이 되었다. 윤태응(尹泰膺)[1855~?]의 자는 임언(任彦)이다. 7~8세 때부터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아버지가 편찮으시자 얼음 속에서 물고기를 잡아 쾌차하게 하였다. 후에 병이 들자 손가락을 깨물어 입에 피를 흘려보내어 하루를 연명하게 하였다.

윤상철(尹商喆)[1658~1732]의 자는 덕우(德優)이다. 저녁에는 요와 이불을 깔고 아침에는 문안드리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으며 몸소 물고기를 잡고 땔나무를 하여 공양하여 부모를 기쁘게 하였다. 산의 꿩이 부엌으로 들어오는 이적이 있었다. 상을 당하여 시묘살이 하면서 매우 슬퍼하였고 예제를 따랐다. 윤태종(尹泰琮)[1844~1919]은 능주군 회덕면장을 역임했다.

[자연환경]

회덕 마을은 동쪽으로 약간의 구릉과 함께 천년동에 이어진다. 서쪽과 북쪽으로는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남쪽으로는 약간의 들과 함께 천덕제 저수지와 산으로 둘려 있다.

[현황]

2013년 현재 50가구 93명의 남원 윤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1947년에 건립한 남원 윤씨 재각인 영모재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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