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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동의 사람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T02016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
집필자 현혜경

김성원은 용담동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용담1동, 2동 구분을 잘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1동에 살던지 2동에 살던지 간에 모두 용담동 사람들이라는 한묶음으로 그들을 엮는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인 즉 오히려 행정적 구분을 짓고 인구수를 동별로 추정하는 것은 일련의 식자층들이란다. 실제로 제주시 주민들은 모두 용담을 하나같이 인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용담 몇 동에 산다고 이야기 하지 않고, ‘정뜨르’니 ‘용소’니 하는 자연마을 위주로 구분하여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용담동에 산다고 하면 다른 마을 사람들은 용담 몇 동에 사느냐고 묻지 않고 ‘정뜨르 살암구나’하고 마을 이름을 고쳐 되묻는다고 한다.

부득불 행정적 의미로 용담1동을 구분짓는다면 병문천한천 사이가 용담1동이다. 한천용담1동과 2동을 나누는 경계가 된다. 지금의 동경계는 1985년 제주시 조례 1034호에 의해 인구 과다로 용담1동과 2동이 분동되었다고 한다. 용담1동 동사무소에 따르면 현재 용담1동의 인구는 9천 여 명, 3천6백여 세대 정도로 이는 제주시 다른 동들에 비해 중간 정도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용담동은 한적한 마을이었던 것 같다. 김성원도 한두기 마을에나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살았다고 들었다는데, 조선 정조 때의 『제주읍지(濟州邑誌)』에 의하면 ‘용담동한두기에는 52호, 남자 1백6명, 여자 1백70명 합계 3백36명이 산다’고 기록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한적한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광무 8년(1908년)의 『삼군호구가간총책』에 따르면 ‘1904년 제주목 중면 용담리에는 2백35호에 5백54명(남 2백76명, 여 2백78명)이 살고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는 『용담동지(용담동지편찬위원회, 2001년)』에 의하면 ‘중면 관내 마을 가운데 11위에 해당하는 인구’라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일제시대에 이르러서는 용담동의 인구가 2천95명 4백4호로 화북, 삼도, 노형, 삼양동 다음으로 많았다고 한다. 이를 토대로 보아 일제시대에 이르러 용담동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일제시대에 용담1동의 인구가 급증한 것일까?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때 일본 사람들이 들어와서 제일 먼저 개발했던 곳이 용담 ‘정뜨르(정평동이라고 불리기도 함)’였다고 한다.

원래 ‘정뜨르’라는 지경은 넓은 들판으로 지금의 용담2동에 자리하고 있는 제주서초등학교 인근과 전 제주대학 인근 자리를 포함해서 전부 정뜨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정뜨르는 일제시대 일본의 군용 비행장이 들어서면서 그로 인한 인구 증가가 있어왔다고 한다. 물론 군용 비행장이 들어서는 마을의 사람들은 철거를 하게 되었고, 그 사람들은 모두 용담동의 다른 지경인 먹돌새기, 서비행장마을, 소레기동산 부근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1920년대에는 제주성곽이 모두 철거되고 시가지가 확대되면서 용담동의 인구 유입이 늘어나게 되었고, 특히 1950~60년대에는 이를 기반으로 제주 시가지와 연접하면서 용담동은 인구 증가로 분동을 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성원이 1985년경 용담에 왔을 때는 이미 용담1동과 2동은 분동되어 있었다고 한다. 용담1동은 2동에 비해 제주중학교가 있고, 향교가 있어서 많이 변하지는 않았지만, 1970년대 이후 삼도동 관덕정 인근에 있던 관공서들이 다른 동으로 이전하면서 분주하던 용담동은 한적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서문시장에 드나들던 사람들의 수도 급격히 줄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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