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08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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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寧金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상전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노석 |
입향 시기/일시 | 1775년 - 김분수 진안으로 입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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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김녕 - 경상남도 김해시 |
입향지 | 김녕 김씨 김복수 입향지 - 전라북도 진안군 상전면 월평리 |
세거|집성지 | 김녕 김씨 세거지 - 전라북도 진안군 상전면 월평리 |
성씨 시조 | 김시흥(金時興) |
입향 시조 | 김분수(金芬秀) |
[정의]
김시흥(金時興)을 시조로 하고, 김분수(金芬秀)를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진안군 일대에 살고 있는 세거 성씨.
[연원]
김녕 김씨(金寧金氏)의 시조 김시흥(金時興)은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9세손으로 의성(義城)에서 출생하여 고려 인종 때 묘청의 난을 평정하여 금주군(金州君)에 봉해졌으며, 명종 대에는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토평하는 데 공을 세워 식읍을 하사받고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김시흥을 시조로 하고 관향을 김녕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다가 고려 말에 지명이 김해(金海)로 개칭되자 김해로 칭관(稱貫)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로왕 계통의 김해 김씨와 혼돈되므로 김해 김씨를 선김(先金)으로, 김녕 김씨는 후김(後金)으로 칭하다가 1865년(고종 2) 왕명에 의하여 김녕(金寧)으로 정하였다.
김녕 김씨는 영돈녕공 준파(領敦寧公遵派), 진주 목사공 형파(晉州牧使公炯派), 충정공 준영파(忠貞公俊榮派), 충경공 경세파(忠敬公景世派), 송암공 질파(松菴公秩派), 만은공 길상파(晩隱公吉祥派), 충의공 문기파(忠毅公文起派), 대사성공 지파(大司成公智派), 도순찰사공 문제파(都巡察使公文齊派), 상서공 문희파(尙書公文熙派)로 나누어져 있다. 조선 시대에 절의 두 명, 공신과 판서 및 기타 관직에 31명을 배출하였다.
[입향 경위]
진안에는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진안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김문기의 후손인 김분수(金芬秀)로 1775년(영조 51)에 남원 백암방에서 상전면 월평리로 들어왔다. 김분수는 자는 현서(玄瑞)이며 통정대부였다. 처음에는 상전면 월평리로 들어왔다가 뒤에 백운면 운교리 용지동으로 옮겼다.
이외에도 진안에 우거한 김녕 김씨로는 고종 대 영동군 심천면 약목리에서 마령면 덕천리 대동으로 이거한 김낙흥(金洛興), 함양에서 부귀면 오산리로 이거한 김복원(金福源), 금산에서 주천면 신양리 성암로 이거한 김윤석(金允石), 순조 대 남원에서 진안읍 반월리로 이거한 김형찬(金炯贊), 1849년(철종 15)에 남원에서 진안읍 오천리로 이주한 김효원(金孝源), 영동에서 주천면 신양리 성암으로 이주한 김희순(金羲淳) 등이 있다.
[현황]
진안군 상전면 월평리, 백운면 운교리 용지동, 마령면 덕천리 대동, 부귀면 오산리, 주천면 신양리 성암, 진안읍 반월리, 진안읍 오천리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김녕 김씨는 2000년 기준으로 전국에 16만 2204호에 51만 3015명, 전라북도에 6,196호에 1만 9038명, 진안에 107호에 346명이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