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10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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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士範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임혜영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김사범 이석용 부대에 참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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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김사범 건국 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김사범 출생지 - 전라북도 진안군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이석용 의진 중군장 |
[정의]
개항기 진안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활동 사항]
김사범(金士範)[?~?]은 이석용 의진에 참여하여 의병 활동을 하였다. 1905년 11월 체결된 을사늑약은 우리 민족에게 국망의 위기를 절감하게 하였다. 1907년 정미 7조약으로 군대가 강제 해산되고 해산 군인들이 대거 의 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의병 전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 시기 호남 지역에서의 의병 전쟁은 1907년 9월에 결성된 호남 창의회 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서 비롯되었다. 호남 창의회 맹소는 호남 유림의 연합 의병으로, 봉기 직후에는 별도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기삼연 의진을 정점으로 활동을 펴다가 후에는 여러 의진으로 분리하여 항전을 펴 나갔다. 석전리(石田里)에서 2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기병한 이석용 부대는 1907년 9월 13일 진안읍을 점령하였고, 11월 17일에는 장수를 공략하여 일본군을 격퇴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김사범은 이석용 의병장이 거의할 때 함께 참여하였다. 처음에는 이석용 의진의 후군장을 맡아 대일항전을 전개하다가, 1908년 3월 5일 중군장이 되었다. 그 후 같은 해 4월 말까지 진안·장수 등지에서 20여 차례 이상 항일 무장 투쟁을 벌여 일본군 수비대는 물론, 친일적 행위를 일삼고 있던 일진회(一進會) 회원과 자위단장 및 친일 관료 등 수십 명을 처단하였다. 그 밖에 일제의 경제적 침탈의 앞잡이인 일본인 상인 다수를 처단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상훈과 추모]
1995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