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18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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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江昌五賢洞契遺蹟碑 |
이칭/별칭 | 강창오현비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영미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516년 - 전계종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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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592년 - 전계종 사망 |
건립 시기/일시 | 1952년 - 강창 오현동계 유적비 건립 |
현 소재지 | 강창 오현동계 유적비 -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
성격 | 비석 |
관련 인물 | 전계종(全繼宗)|신기(辛麒)|정대수(鄭大壽)|홍필(洪滭)|송대홍(宋大弘) |
크기(높이,너비,두께) | 146㎝[높이]|58㎝[폭]|26㎝[두께] |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원강정 마을 앞 길가에 있는 유적비.
[개설]
강창은 지금의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이다. 오현은 전계종(全繼宗), 신기(辛麒), 정대수(鄭大壽), 홍필(洪滭), 송대홍(宋大弘) 등 5인을 가리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계종이 의병을 일으켰고 나머지 4인이 도왔는데 전계종은 난리 중에 싸우다 순절하였다. 5인의 의거를 기리기 위해 인근 유림들이 1952년에 마령면 강정리에 강창 오현동계 유적비를 세웠다. 비석 앞뒤에는 1952년에 최병심(崔秉心)이 찬한 「강창 오현동계 유적비명」이 새겨져 있다. 비명의 핵심 내용은 강창 오현이 임진왜란 시에 거의한 내력이다. 한편 1977년에는 오현의 의거를 기리기 위해 오현사(五賢祠)를 창사하기도 했다.
[건립 경위]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원강정 마을 안에 있는 강창 오현동계 유적비에는 강정리에 살던 5인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운 내력이 새겨져 있다. 선조 때 진안현 강창리(江昌里)에 의계(義契)가 있었는데 전습독(前習讀) 규암(葵菴) 전계종(全繼宗), 감찰 신기(辛麒), 습독 정대수(鄭大壽), 현감 홍필(洪滭), 운포(雲圃) 송대홍(宋大弘) 등이 창설하였다. 이 다섯 명은 모두 한 시대의 명류로 뜻도 같고 도의도 합치하여 이웃에서 살면서 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가절을 만나면 술잔을 기울이고 시를 읊으며 생활하였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전계종이 의병을 일으켜 싸우자 나머지 네 사람도 함께 도와서 군량을 모집하고 운반하였다. 전계종이 싸우다 순절하니 특별히 공조 참의에 증직되고 영계 서원에 배향되었다. 나머지 네 사람은 계속 전진하기로 맹세하고 다시 격문을 발송하였는데 적이 물러나서 그만두게 되었다. 그로부터 이들은 명리를 구하지 않고 도학을 강하고 세속의 풍습을 바로 잡는 것에 힘썼다고 한다. 강창은 지금의 강정리를 말하는데 돌을 세워 그 사적을 기록한 것이 강창 오현동계 유적비이다. 유적비는 인근 유림들에 의해 1952년에 건립되었다.
[위치]
마령 초등학교에서 강정교를 지나 500m 정도 가면 원강정 마을이 나온다. 강창 오현동계 유적비는 마령면 강정리 원강정 마을 앞 길가에 위치해 있다.
[형태]
유적비는 비신의 폭 58㎝, 두께 26㎝, 높이 146㎝이다. 비석은 비석을 받치는 대좌가 있으며 비석 머리에 지붕이 씌어져 있다.
[금석문]
유적비에는 앞뒤로 1952년에 최병심(崔秉心)이 찬한 「강창 오현동계 유적비명」이 행서체로 새겨져 있는데 병서 부분과 명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병서 부분에는 강창 오현이 조송(趙宋) 때 남전의 여씨 4형제를 본받아 강창[강정]의 다섯 사람이 계를 만든 내용, 임진왜란 시에 거의한 내력, 이후 후손들이 오현의 계를 계속 이어간 내용 등으로 되어 있다. 명 부분에는 의계(義契)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강창 오현동계 유적비명」은 원문과 번역문이 『진안 향토 문화 백과사전』 권말 부록에 실려 있다.
[현황]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원강정 마을 앞 길가에 세워져 있는 유적비는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비각은 전면 1칸, 측면 1칸의 기와 맞배 건물이다. 비각 뒤에는 600년 된 당산나무가 있다.
[의의와 평가]
의병은 국가가 외침을 받아 위급할 때 국민 스스로 일어나 조직한 자위군을 말한다. 강창 오현동계 유적비를 통하여 진안 지방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국가 위기 상황에서 상당수의 사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국권 수호에 일조하였던 유서 깊은 고장임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