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014
한자 朝鮮 劍舞- 嚆矢 密陽劍舞
영어공식명칭 Miryang Sword Dance, the Beginning of Joseon Sword Dance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석태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에서 전승되어 오는 전통 춤.

[개설]

검무는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맥을 이어 오고 있는 우리나라 전통 춤의 하나이다. 고대의 수렵이나 제사, 전투 등에서 무기를 가지고 춤을 추었던 데에서 유래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밀양검무의 정의]

밀양검무는 조선 후기 밀양 출신 기생 운심(雲心)에 의하여 유명해졌다. 밀양검무는 두 명의 무녀(舞女)가 양손에 장검을 들고 날렵한 춤사위로 공격과 방어를 하며 춤을 준다. 밀양민속예술보존회가 1987년 발간된 『밀양지』에 운심의 일화와 박제가(朴齊家)의 「검무기(劍舞記)」가 소개된 것을 보고 복원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당시 생존해 있던 밀양권번(密陽券番) 마지막 예기(藝妓) 정금수(鄭金守)에게서 밀양권번에서 전하여 오는 춤사위에 대하여 고증을 받아 1988년 밀양 출신 김은희(金恩姬)가 복원하였다. 이때 김은희는 무구(舞具)인 칼과 무복(舞服), 음악, 무예적인 춤사위 등을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자문하여 운심의 검무에 가깝게 복원하였다. 1991년 밀양에서 첫선을 보인 뒤 1992년 전통무용 발표회에 발표하였다. 이후 밀양검무보존회를 조직하여 2005년부터는 해마다 밀양검무 정기 공연을 개최하고, 또 지속적인 연구와 전수 교육을 하고 있다. 이제 밀양검무는 다른 지역과는 차이를 보이는 밀양만의 독특한 검무로서 지역의 문화유산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밀양검무의 효시 운심]

조선 후기 밀양 출신 기생 운심은 우리나라 검무를 최고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려 놓은 역사적인 인물이다. 박제가의 「검무기」에는 두 명의 기생이 쾌자[군복]를 입고 검무를 추는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무릇 치는 동작, 던지는 동작, 나아가는 동작, 물러나는 동작, 위치를 바꾸어 서는 동작, 스치는 동작, 떨어지는 동작, 빠른 동작, 느린 동작이 다 음악의 장단에 따라 합치되어 멋을 자아내었다. 이윽고 쟁그렁 소리가 나더니 검을 던지고 넙죽 절하였다. 춤이 끝난 것이다. 온 좌석이 텅 빈 것같이 고요하여 말이 없었다.……근세에 검무를 추는 이로는 밀양 기생 운심을 일컬으니 이들은 대개 운심의 제자들이다.”라고 하였다.

신윤복(申潤福)의 「쌍검대무(雙劍對舞)」나 김홍도(金弘道)의 「평안도관찰사부임축하도(平安道觀察使赴任祝賀圖)」 중 「부벽루연회도(浮碧樓宴會圖)」에는 검무를 추는 기생이 그려져 있는데 기생들이 추는 검무는 모두 운심에게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요즈음 검무에서 사용하는 칼은 끝이 뭉뚝하고 날이 없는 검이지만, 조선 후기 기생들이 추는 검무에서 사용하는 칼은 끝이 뾰쪽하고 날이 선 진검이었다. 보기에도 살벌한 진검을 양손에 들고 날듯이 몸을 움직이면서 춤을 추면, 보는 사람들의 간담이 서늘하여질 정도로 감동이었을 것이다. 이와 함께 검무를 추는 사람들은 검무를 배우기에 앞서 검을 다루는 훈련, 다시 말하면 검사로서의 호된 훈련을 겪었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여인이 그러한 검무를 추었다면, 기생이기에 앞서 여검사로서 많은 사람의 호기심과 관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 분명하다.

검무는 원래 삼국시대 신라 남자 무사들이 추던 황창무(黃昌舞)라는 춤인데,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검사의 무예 중 하나로서 전승되어 왔다. 그것이 조선 후기에 기생의 검무로 발전한 것은 모두 운심의 노력 덕분이었다. 운심은 밀양 출신이었지만 주로 서울[한양]에서 활동하였다. 운심은 스무 살의 나이에 서울로 올라가 활동하면서 검무를 최고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고, 또 당대의 유행을 주도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운심보다 한 세대 정도 뒤인 18세기에 활동한 밀양의 대표 문인인 신국빈(申國賓)은 응천교방(應天嬌坊)[응천은 밀양의 옛 이름임] 가사 「응천교방죽지사(凝川敎坊竹枝詞)」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호서 상인 모시 옷감 눈처럼 새하얗고[湖商苧布白如雪]/ 송도 객주 운라 비단 그 값은 얼마인가[松客雲羅直幾金]/ 술에 취해 화대 줘도 아깝지 않은 것은[醉與纏頭也不惜]/ 운심의 검무와 옥랑의 거문고라[雲心劒舞玉娘琴]/ 연아는 스무 살에 서울에 들어가서[煙兒二十入長安]/ 연꽃 같은 춤을 추자 일만 개 눈 서늘했지[一舞秋蓮萬目寒]/ 청루에는 안장 얹은 말들이 몰려들어[見說靑樓簇鞍馬]/ 명문가의 젊은이들 한가할 새 없었다지[五陵年少不曾閒].”

가사의 끝부분에는 운심의 검무와 옥랑(玉娘)의 거문고 연주가 모두 한 시대에 이름이 높았다는 내용의 주석이 달려 있고, 뒤의 시 끝부분에는 운심은 일명 연아(煙兒)라고 한다는 내용의 주석이 달려 있다.

운심과 운심의 검무는 명성에 걸맞게 조선 후기 명사들의 많은 기록과 이야기 속에 등장한다. 박지원(朴趾源)의 소설 「광문자전(廣文者傳)」에 등장하는 운심은 힘깨나 쓰는 자들의 요구에는 춤을 추지 않다가, 온갖 추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인간미와 협기를 지닌 광문의 손장단에 일어나 춤을 추는 도도하면서도 협객 정신을 가진 기생이다. 또 성대중(成大重)은 「청성잡기(靑城雜記)」에서 운심이 조선 후기 최고의 서예가 윤순(尹淳)과 정인 관계였다고 한 것을 보면, 당나라 초서(草書)의 대가 장욱(張旭)이 검무 달인 공손대랑(公孫大娘)의 검무를 보고 새로운 필법을 창안하였던 것처럼, 윤순도 운심의 검무를 통하여 필법의 높은 경지를 깨우쳤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이덕무(李德懋)의 「입연기(入燕記)」에는 “밀양의 운심은 명기이다. 절도사 이은춘(李殷春)이 영변주사로 있을 때 부친이 사랑하던 기생이라고 하여 데리고 왔는데 운심은 벌써 늙어 머리가 허옇게 세었다. 운심이 약산 동대(東臺)에 올라 한참 바라보다가 갑자기 강개한 기분이 들어 ‘밀양의 운심이가 약산 동대에 올라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뛰어내려 죽었다고 후세 사람들이 말한다면 어찌 장한 일이 아니랴.’라고 하고는 치마를 감싸고 몸을 던졌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붙잡아 죽음을 모면하였다.”라고 하여 운심의 노년 모습을 전하고 있다. 특히 이덕무의 이 기록을 통하여 운심이 늙어서도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뼛속까지 예인(藝人)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밀양검무의 계승: 무구와 무복, 음악, 춤사위의 복원]

김은희는 정금수에게서 밀양권번에서 전하여 온 춤사위에 대하여 고증을 받은 뒤 무구와 무복, 음악, 무예적인 춤사위 등을 각 분야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하여 운심의 검무에 가깝게 복원하였다.

먼저 무구와 무복의 복원을 살펴보면, 운심의 검무에 사용되는 칼은 원래 장검이었는데, 조선 후기 이후 점차 짧아지다가 일제강점기 권번에서는 칼날이 뭉뚝해지고 목이 돌아가는 짧은 칼로 바뀌었다. 그래서 원래대로 3척 길이의 장검으로 복원하면서 목이 돌아가지 않는 긴 칼을 사용하게 되었다. 길이는 3척을 기준으로 하고 무녀의 키에 맞추어 제작하였다. 칼날은 백동 재질이고 약간의 굽음이 있다. 자루는 나무로 만들었고 그 위에 자주색 실이 달려 있다. 자루목 부분에 황동으로 된 코등이가 있고 자루 끝에는 황동으로 된 투겁이 있으며 빨간색 유소[깃발 등에 달던 술]가 달려 있다.

무복은 신윤복의 「쌍검대무」에 표현된 복식으로 복원하였다. 기본적으로 흰색 속바지를 입고 속치마를 입은 뒤에 겉치마와 저고리를 입는다. 치마와 저고리 위에 전복[쾌자]을 입고 전대를 두르는데 쾌자는 갑사(甲紗)이며 2인의 옷감 색은 같다. 겉감은 보랏빛이 감도는 자주색이다. 안감은 2인 중 한 사람은 주황색이고 다른 한 사람은 짙은 붉은색이다. 소매 앞섶이 없고 뒷솔기가 허리 이하는 터졌다. 전대 역시 갑사로 2인이 각각 다른데 한 사람은 파란색 전대를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짙은 초록색 전대를 한다. 전대는 가슴 앞에서 등 뒤로 돌려 리본 모양을 만들어 묶는다. 전립은 겉은 흑색이고 안쪽은 비취색이다. 공작우(孔雀羽) 3개와 홍색 상모(象毛)가 정자에 달려 있다. 머리는 가채를 하고 나서 전립을 쓴다. 밀양검무의 한삼은 밀양 예기 권번에서 전하여 온 것이다. 일곱 색깔의 색동 한삼으로 손목 부분부터 홍색, 백색, 자주색, 노란색, 청색, 진분홍색, 연두색으로 되어 있다.

그다음으로, 음악의 복원을 살펴보면, 밀양검무에 사용되는 음악은 경상남도 밀양 지역 검무라는 점을 고려하여 남도음악의 정통을 이어 가고 있는 이생강(李生剛)에게 자문을 구하여 남도제 대풍류와 남도굿거리 음악을 사용하는 것으로 복원하였다. 남도제는 서울 이남의 충청도·전라도·경상도 지역 음악을 말하고, 대풍류 또는 죽풍류(竹風流)는 대나무로 만든 악기를 사용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음악 복원 당시 밀양검무 반주 악기는 피리 2, 대금 1, 아쟁 1, 장고 1, 북 1의 삼현육각(三絃六角)으로 편성하여 연주하였다. 대체로 아쟁을 사용하지만, 밀양검무 공연에서 라이브 음악 반주를 할 때는 아쟁과 해금을 모두 편성하여 연주하기도 한다.

남도제 대풍류는 본영산, 중영산, 잔영산, 도드리, 염불도드리, 타령, 자진타령, 군악의 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밀양검무에서는 그중에서 본영산, 염불도드리, 타령, 자진타령, 군악을 사용하고, 자진타령 다음에는 굿거리가 삽입되어 있다. 이것은 남도제 굿거리인데, 본래 대풍류 속에 있는 가락은 아니지만 춤에 맞추어 삽입한 것이다. 밀양검무 초연 당시에는 본영산 10박 4장단, 염불도드리 6박 36장단, 타령 4박 36장단, 자진타령 4박 24장단, 굿거리 4박 40장단, 군악 4박 96장단, 느린 염불도드리 2장단으로 구성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본영산 10박 4장단, 염불도드리 6박 36장단, 타령 24장단, 자진타령 12장단, 굿거리 24장단, 군악 4박 96장단, 느린 염불도드리 2장단으로 구성하여 추고 있다. 전체 소요 시간은 약 14분 16초 정도이다.

끝으로, 춤사위의 복원을 살펴보면, 밀양검무는 크게 한삼춤, 맨손춤, 칼춤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칼춤 부분에서 무예적인 요소가 돋보이는 운심의 검무를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고자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쌍검보(雙劍譜)」의 동작을 응용하여 밀양검무 춤사위에 삽입하였다. 박제가의 「검무기」를 비롯한 다른 검무 관련 시와 그림을 분석하는 외에 조선 후기 기녀들이 무사들과 함께 무예를 훈련하고 시험을 보았다는 사실에 의거한 것이다. 김은희는 전통무예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한 뒤 「쌍검보」의 13가지 동작을 모두 응용하여 다양한 춤사위로 공격과 방어를 하며 무예적인 요소가 돋보이는 춤사위를 복원하였다. 반주 장단에 따라 구분하면, 본영산장단에 관중에게 절을 한 뒤, 염불도드리장단과 타령장단에 한삼춤을 추고, 자진타령장단과 남도굿거리장단에 맨손춤을 추고, 군악장단에 칼춤을 추고, 마지막 느린 염불도드리장단에 인사를 한다.

한삼춤은 밀양검무의 도입부인데, 노린 속도의 음악인 본영산장단, 염불도드리장단, 타령장단에 맞추어 춤을 춘다. 먼저 본영산장단에 관객에게 절을 하고 일어나서 한삼을 머리 위로 뿌려 귀밑으로 옷깃을 여미며 다시 둘이 마주본다. 염불도드리장단이 시작되면 허리에 뒷짐을 지고 발어름사위를 하면서 검 주위를 한 바퀴 돌고, 팔을 들어 서로 만났다가 일렬종대로 하였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타령장단이 시작되면 한삼사위로 춤을 추는데, 밀양검무의 대표 춤사위인 앞사위, 뒷사위, 머리사위를 하면서 서로에게 다가간 다음, 오히려 서로 지나쳐 자리를 바꿨다가 다시 무대 중앙에서 만난다. 서로 어깨를 마주하여 반 바퀴 돌아 자리를 바꾸고 뒷걸음질치며 본래 자리로 되돌아간다. 한삼을 벗어던지고 무대 중앙에서 다시 서로 만나 상대어름사위를 하는 것으로 한삼춤이 이루어진다. 타령장단에서는 박자마다 한삼을 날리는 동작을 주로 하게 된다.

맨손춤은 자진타령장단과 남도굿거리장단으로 춘다. 자진타령장단은 타령장단보다 속도가 빠른 장단이므로 좀 더 경쾌하고 절도가 있는 느낌이 든다. 이와 달리, 남도굿거리장단은 자진타령장단보다 느린 속도로 칼 앞에 앉아서 의식을 치르는 느낌이 든다. 먼저 자진타령장단이 시작되면 맨손으로 헛손질을 하는 사위를 하고 팔을 들어 올려 어르면서 뒤로 물러났다가 앞으로 나아간 뒤, 칼 주변을 한 바퀴 돌아 쾌자의 앞자락을 잡고 칼 앞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남도굿거리장단에는 쾌자를 잡은 상태로 몸을 숙였다가 다시 일으키는 굴신 동작을 반복한다. 몸을 숙여 칼 앞에서 한 손으로 어름사위를 한 다음, 쾌자를 허리 뒤로 묶는다. 허리 뒤에서 묶은 쾌자를 잡은 상태로 몸을 비틀어 겨드랑이로 숙였다가 등으로 일어나는 동작을 하고, 날아오를 듯 두 팔을 벌렸다가, 다시 몸을 숙여 칼 앞에 손으로 땅을 짚고 몸을 좌우로 어르는 동작을 한 뒤, 몸을 숙인 채로 두 팔을 벌려 허리 뒤로 보낸다. 남도굿거리장단 동안에는 계속 앉아서 팔을 벌렸다가 몸을 숙이고 다시 일으키면서 팔을 벌리는 동작을 반복적으로 하게 되면서, 칼을 잡을 듯 말 듯 어르는 동작이 반복된다.

칼춤은 가장 빠른 장단인 군악장단에 맞추어 추는데, 빠른 장단 속에서도 느린 동작과 빠른 동작의 변화가 적절히 이루어진다. 군악장단이 시작되면 앉은 상태에서 먼저 오른손으로 칼을 잡아 머리 위에서 칼을 한 바퀴 돌리는 동작을 하고 왼손도 칼을 잡고 일어나서 검을 공중에 던졌다 잡는다. 「쌍검보」의 동작들인 칼을 앞으로 내는 동작, 칼을 걸어 올려 몸을 감싸는 동작, 칼로 찌르는 동작 등을 하고 칼돌림사위를 하다가 양쪽으로 갈라선다. 서쪽 무녀는 가만히 있고 동쪽 무녀는 자태를 뽐내며 공격한 다음, 서쪽 무녀의 반격으로 둘이 빠르게 공격과 방어를 한다. 다시 칼돌림사위를 하면서 두 사람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태극선으로 돌다가 본격적인 대무가 펼쳐진다. 방어하는 무녀는 뒤로 물러나면서 회전하여 막는 동작을 하고, 공격하는 무녀는 앞으로 나아가면서 칼로 몸을 감싸며 내려 베는 동작을 번갈아 한다. 그리고 서로 앞뒤로 진퇴하면서 칼로 몸을 감싸 올렸다가 내려 베어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동작을 하면서 진퇴하여, 나아가는 사람은 공격이 되고 물러나는 사람은 방어하는 동작을 한다. 그리고 손을 허리에 둔 채 이마를 맞대어 아래위로 날아오르는 연풍대(筵風擡)를 하며 잠시 대결을 멈추는 듯하다가, 다시 마지막 공격과 방어의 동작으로서 내려 베는 동작으로 나아가고 올려 베는 동작으로 물러난다. 칼돌림사위를 하면서 어깨를 맞대고 돌다가 서로 떨어져 원을 돌면서 어깨를 맞대고 돌다가 서로 떨어져 원을 돌면서 연풍대 동작을 한다. 마지막으로 빠르게 칼돌림사위를 하면서 어깨를 맞대어 원으로 돌다가 검을 던진다. 군악장단이 끝남과 동시에 칼을 던지고 나면 느린 염불도드리장단에 숨을 고르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둘이 마주하여 예를 갖추고 절을 하고 끝난다.

[밀양검무의 의의, 현대적 계승]

운심에 대한 이야기는 조선 후기 여러 문집과 야담집에 실려 전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 대부분은 운심과 운심의 검무, 그와 관련한 에피소드에 불과하고, 운심의 일생이 어떠하였는지를 알려 주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앞서 든 신국빈의 「응천교방죽지사」를 통하여 운심이 밀양 출신이고 또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서울로 올라가 검무로 당대에 명성을 날린 사실이 확인될 뿐이고 밀양에서 운심이 어떤 생활이나 활동을 하였는지, 출신 마을이나 부모형제·친지 등 유관한 사람들, 상경 이후 활동이나 생활, 운심의 죽음에 대하여 알려 주는 기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운심은 스무 살 전까지 살았던 고향 밀양에 대하여 절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죽은 뒤에는 고향에 돌아와 묻혔다. 얼마 전까지 밀양시 상동면 안인리 신안마을 근처 벼랑 위쪽에는 운심의 산소로 알려진 곳이 있었으나 2006년 연속된 태풍으로 봉분이 유실되고 말았다. 운심의 검무는 1988년 김은희에 의하여 밀양검무로 복원되고 1992년 서울에서 초연한 이후, 2005년부터는 해마다 밀양검무 정기 공연을 개최하여 계속 보완·발전되고 있다. 그리고 김은희와 밀양검무보존회의 노한나 등에 의하여 학술적으로 체계화되어 춤사위와 무보의 기본틀이 확립되고 전수 교육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이와 함께 운심의 검무를 소설화한 작품도 『칼의 춤』[2015년]과 『칼춤』[2016년]의 두 작품이 발표되어 운심과 운심의 검무, 그 이야기가 널리 대중에게 전파될 가능성이 열렸다.

밀양검무와 운심의 여러 이야기는 지역의 문화 자산으로 콘텐츠화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다른 여러 검무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말 그대로 무용 도구의 하나로서 장신구에 가까운 칼을 들고 추는 춤이 아니라, 진검에 가까운 장검을 들고 추는, 그야말로 무인의 정신, 협객의 정신, 옛 밀양인의 기상이 그대로 살아 있는 운심의 검무로서 계승·발전하여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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