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2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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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浪里 |
영어공식명칭 | Samrang-ri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삼랑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기혁 |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삼랑리(三浪里)는 밀양시 삼랑진읍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삼랑리의 남서쪽에서 밀양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며 유로를 사이에 두고 상남면과 김해시와 마주 보고 있다. 동쪽으로 송지리, 북쪽으로 미전리와 접하고 있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기 전까지 삼랑진읍의 중심 마을이었다. 상부, 하부, 내부, 거족을 비롯하여 하양, 뒤기미 등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명칭 유래]
‘삼랑리’ 지명은 삼랑포에 설치되었던 삼랑창(三浪倉)에서 비롯되었다. 영남대로가 지나며 낙동강 수운이 교차하여 삼랑진에는 큰 포구가 형성되었다. ‘삼랑’은 밀양강, 낙동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세 줄기 강물이 부딪쳐 거센 물결이 생기는 곳이라 하여 붙여졌다. 『호구총수(戶口總數)』[1789]와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에 ‘삼랑리’ 지명이 수록되어 있다.
[형성 및 변천]
1914년 경상남도 밀양군 하동면 삼랑리가 개설되었다. 1928년 하동면이 삼랑진면으로 개칭되어 경상남도 밀양군 삼랑진면 삼랑리가 되었다. 1963년 1월 1일 삼랑진면에서 삼랑진읍으로 승격되어 경상남도 밀양군 삼랑진읍 삼랑리가 되었다. 1995년 1월 1일 밀양군과 밀양시 통합에 따라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삼랑리가 되었다.
삼랑리의 취락은 조선시대 나루터가 있던 삼랑창 일대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상부마을은 밀양강이 낙동강으로 유입하는 하구의 백사장 연안에 있는 마을이다. 후조창(後漕倉)이 인근에 있어 저점(邸店)[조선 후기에, 연안 포구에서 상인들의 숙박, 화물의 보관, 위탁 판매, 운송 따위를 맡아보던 상업 시설] 거리로 번창하였다. 하부는 상부의 동쪽 고개 너머 낙동강 변에 있고 선창이 있어 조선시대 삼랑진의 중심 마을이었다.
동쪽의 텃골에 하양마을이 있다. 내부는 하부의 안쪽 계곡에 있는 마을이다. 일명 통작골 혹은 통창골(統倉골)로 불렀으며 창고와 당집이 있었다.
거족마을(巨族마을)은 삼랑리 서쪽의 밀양강 변에 있는 마을이다. 과거에는 침수가 잦았으나 제방이 세워진 후 딸기 농사가 성하였다. 제비들이 날아들어 ‘큰제비’라 부르다가 변음된 데서 지명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거연(巨燕)이라고도 부른다. 1905년 경부선 철도의 철도역이 동쪽의 송지리에 세워지고, 경전선이 나뉘어지면서 송지리의 삼랑진역 주변이 철도 교통의 중심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삼랑리에 있던 조창도 없어지고 중심 기능도 삼랑리에서 송지리로 이동하였다.
[자연환경]
삼랑리 북쪽의 매봉산 줄기가 서북쪽으로 이어지면서 북쪽 경계를 이룬다. 산록에 계류천이 흘러 곡저부에 평지를 이룬 곳에 마을이 발달하여 있다. 남쪽은 낙동강에 잇닿아 있어 산지 끝 부분에 평지가 있고 경전선 철도가 지난다. 서쪽의 밀양강에 연한 곳은 퇴적사면을 이루어 너른 충적지가 만들어져 있다.
[현황]
2021년 12월 현재 289세대, 503명[남자 242명, 여자 261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삼랑리의 농업은 서쪽 밀양강 변의 충적지에서 이루어지며 벼와 딸기를 재배하는 시설농사가 행해진다. 동쪽 송지리의 경부선 철도에서 갈라진 경전선이 지나며 낙동강역이 있다. 국도 제58호선이 삼랑진교를 거쳐 김해시와 이어진다.
삼랑리의 상부마을에는 오우정(五友亭)과 삼강서원(三江書院)이 있다. 『경상도읍지』에는 오우정과 관련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삼강서원은 16세기에 민구령(閔九齡)이 삼랑루(三郞樓)가 있던 자리에 정자를 짓고, 이에 오형제가 기거하면서 학문을 닦았다고 하는 오우정 일대에 세워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