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494
한자 朴㽕
영어공식명칭 Park Yu
이칭/별칭 경배(景培)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금곡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병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76년연표보기 - 박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17년 - 박유 무과 급제
몰년 시기/일시 1627년 1월 21일연표보기 - 박유 사망
출생지 금곡리 -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금곡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금계사 -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금곡리
성격 무신
성별 남성
본관 밀양

[정의]

조선 후기 밀양 출신의 무신.

[가계]

박유(朴㽕)[1576~1627]의 본관은 밀성(密城)이며, 자는 경배(景培)이다. 아버지는 박희기(朴希夔)이며, 아들은 문과에 급제하여 찰방을 지낸 박원형(朴元亨)이다.

[활동 사항]

박유는 1576년(선조 9)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금곡리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밀양에 쳐들어왔을 때 아버지를 모시고 산중으로 피난하였는데, 곡식을 구하러 산에서 내려왔다가 왜적에게 사로잡혀 1597년 일본으로 끌려갔다. 1605년 봄 사명대사가 포로로 잡힌 남녀 3,000여 명을 데리고 일본에서 귀국할 때 밀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박유는 일본에 끌려가 있는 동안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알고 3년 동안 상복을 입었고, 같은 고을 출신인 학자 손기양(孫起陽)과 절도사 김태허(金太虛)에게 학문과 활쏘기를 배웠다. 1617년(광해군 9)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봉사 직위를 받았으나, 10년 동안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하며 급히 팔도의 군사를 징집함에 자원하니, 밀양부사를 지낸 여우길(呂祐吉)이 활과 칼을 주며 격려하였다고 한다.

1627년 1월 20일 군대가 안주(安州)에 주둔하였는데, 다음날인 1월 21일 아침밥도 먹기 전에 수많은 적들이 밀어닥쳤다. 상장군이 전사하고 대열이 무너졌지만 박유는 휘하의 병졸 8명과 함께 몸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적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박유는 사망한 뒤 형조좌랑에 추증되었고, 산외면 금곡리금계사(金溪祠)에 배향되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3.11.20 오탈자 수정 [활동사항] 박유는 1575년(선조 8) → 박유는 1576년(선조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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