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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도범 할아버지의 사람관계 이야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T01014
한자 최도범 할아버지의 사람 關係 이야기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
집필자 서정섭

공식 조직

마을의 유래, 형성 과정에 대해 최도범 할아버지는 노봉마을 뒤에 있는 노적봉에서 촌명이 유래하였다고 말해 주셨다. 노봉마을이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노봉서원이 있었고, 그 이전에는 향교가 있었을 것이니까 고려 말이나 중엽에도 마을이 있었을 것이 아닌가라고 추측한다고 말했다. 또 노봉마을은 예로부터 물이 귀해서 메밀, 조, 서숙 등 밭작물을 많이 했었다고 한다. 지금은 장수군의 동화댐에서 농업 용수를 공급받아서 물 부족을 느끼지 않으면서 논농사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노봉마을의 촌명 유래는 언제라고는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아는 것이 없으니까. 그런데 노봉의 촌명은 첫째는 여기서 보면 남서쪽에 노적봉이 있으니까 그 우뚝할 노, 쌓을 적, 봉우리 봉, 우뚝하게 서 있으니까 노적봉이라고 해요, 매부리 봉 자를 써서 노적봉이라고 했어요. 매부리 봉 자는 우뚝 서 있는 매부리같이 생겼으니까 생긴 이름이예요.”

“노봉은 녹두밭머리였고 내가 아들 시절만 해도 물이 귀해서 한해(旱害)를 보는 것이 참 많았어요. 그러니까 지금은 삼계석문에서 올라오는 물이 있어서 대형 양수가 되고 근간에는 장수군 동화댐 물이 넘어 오고 해서 그럭저럭 먹고 살고 있죠. 그래서 힘이 풀렸제. 그 전에는 산골짜기에서 내려오는 그 물만 볼 때는 메밀 심고, 조, 서숙 심고 그런 것이 많았어요.”

“그런데 노봉마을이 언제 생겼느냐 하는 것은 어느 누구한테 구전으로도 들은 바가 없어요. 그런데다가 노봉마을에다가 역사가 있었다 하는 것은 무엇으로 가늠을 하느냐 하면 노봉서원이 1649년에 설립되었으니까 서원 건립 이전에 향교가 있었다고 하니까 향교는 이조(조선) 시절에도 숭상했었지만 고려 시절에 많이 숭상을 했다면서요. 그래서 고려 말이나 중엽에도 노봉마을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 이렇게 대충 예상을 하지요.”

노봉마을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은 수해로 산사태가 난 적이 있다. 1923년 노봉마을에 호성암 북쪽 골짜기가 무너져 내리는 산사태가 있었다. 그 외에는 6·25 때에도 큰 사건이 없었다고 한다.

“마을의 역사적 사건은 갑자년 그러니까 만 82년 전(1923년)에 천태가 있었어요. 천태는 산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을 말하죠. 호성암 북쪽의 골짜기에 천태가 나서 모두다 죽는다고 하는 난리가 있었답니다. 그리고는 특별한 천재는 없었다고 합니다. 여기는 원래가 땅도 빼마르고 수분도 귀하고 의식이 풍부하기는커녕 말할 수 없이 곤란했어요.

이 마을의 자랑거리라고는 할 수 없으나 사람들이 6·25, 6·25하는데 6·25는 경인란이거든요 경인란에도 이 마을에는 희생당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보통은 서로가 찧고 까불고 그런 것인데 좌우익이 구분되어 싸우고 그런데 우리 마을에서는 별로 희생당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스스로 자기네들이 튀쳐나가 가지고 혹시 몇 사람 정도는 희생을 치르고 곤욕을 치르고 하는 정도는 있었지만은 노봉마을이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죠. 그런데다가 혼불문학관이 들어오게 되고 보니까 노봉마을이 살만한 마을이 아니냐라고 생각한다고 합디다.”

노봉마을에 세거하는 성씨는 삭녕 최씨였다.

“마을에는 삭녕 최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는데 근세에 이르러 최씨, 장씨, 오씨, 전주 이씨, 안동 김씨 등이 살기 시작했고, 해주 오씨, 달성 서씨, 밀양 박씨 등이 있고, 박씨는 살아온 연혁이 깊답니다. 연안 차씨는 9-10대에 걸쳐 살고 있어요. 광복 후에는 73호가 살다가 63호가 되더니 요 근래에는 45-6호 정도가 살고 있어요.”

노봉마을에 유명한 것이 많다. 호성암 마애여래좌상, 호성암, 노봉서원, 혼불문학관, 최명희 소설 혼불의 배경지인 노봉마을 등이 유명하다.

마을 출신 중 중요 인물이 많이 있다며 최도범 할아버지께서 이야기하신다.

“근래에 들어서는 최명희의 아버지 성무씨는 일본 동경 조도전 법대를 나왔는데 조선인이라 판검사는 임용이 안되었고, 전주지방법원에서 과장을 지냈어요. 그리고 종가의 종손 최강원 박사(폄재공의 13대손)는 서울대 의대 교수로 있고, 그 둘째 최영희 의원이 있고, 강원이의 재종재인 최강욱은 군 법무관 출신으로 변호사 개업을 했죠. 그리고 전북대 최승범 교수가 있죠. 고조부 때 여기에서 살았는데 조부의 탯자리는 혼불문학관 위의 독립 가옥에서 살았고, 아버지 때는 내 동생 명기네 집 앞에 살았죠. 최승범 교수는 사매소학교를 졸업하고, 순창농림중을 다니다 남원농고에서 졸업했죠.”

“다른 집안에서는 박희섭씨 동생들이 일찍이 서울로 올라가 성공했죠.”

인접한 마을은 서촌마을과 수촌마을이 있다.

서도리(書道里)는 본래 남원군 사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서원리(書院里)와 도촌리(道村里)와 병합되어 서도리라 하고 사매면(巳梅面)에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남원시·군이 통합됨에 따라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가 되었다. 서도리에는 노봉(露鋒), 수촌(藪村), 서촌(書村) 등이 있다. 노봉마을 앞에는 서촌마을이, 좌측으로는 수촌마을이 있다. 수촌은 오래된 촌명은 아니다.”

노봉마을은 임실군 오수면 둔덕리와 교류를 해왔다. 지금은 임실군으로 행정 구역이 달라졌지만 예전에는 오수면 둔덕리도 남원부에 속하는 48방 중의 하나였고 같은 생활권역이었다. 그래서 두 지역은 반촌 지역으로서 서로 교류가 많았다. 인근 마을의 삭녕 최씨, 흥덕 장씨, 진주 하씨, 청주 한씨 집안의 아홉 노인들이 모여 구로계(九老契)라는 모임을 만들어 오늘날까지 400여 년을 이어왔다. 창계되어 400여 년을 이어 온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고, 오늘날도 계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모범적인 일이다. 계가 이어오면서 일제 강점기 무렵에는 약간의 내홍이 있었다고 말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기는 꺼려했다. 마침 찾아간 날이 구로계의 날이어서 계에 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었다.

“오늘 구로계가 있는 날이에요. 삼계석문에 있는 구로정각이 있어요. 구로정각 구로정(九老亭)이 아홉 구(九) 자, 늙은이 노(老) 자, 아홉 늙은이들이 즐기고 그러셨는데 구로계가 그 후손들에게까지 지금 한 400여 년 가까이 계승을 해 나와요.”

구로정은 노봉마을 바로 옆의 임실군 둔남면 둔덕리 우번 746번지로 둔덕리 마을 서쪽 삼계석문 입구에 있는 정자이다. 오수천 오른쪽 산기슭의 언덕에 있으며(관리번호 0708-25-038) 정면 2칸(207㎝X209㎝), 측면 1칸(279㎝)의 팔작 기와집으로서 네 귀에 추녀 받침이 있고 안에는 《단구창설사적기(丹邱創設事蹟記)》(아주최휘지기(鵝洲崔徽之記)) '단구구노회중수서(丹丘九老會重修序)(무인, 1938?) 현판이 걸려 있다. 이곳은 '단구(丹丘)'라고도 하며 조선 선조 때에 장희, 한빈, 하득도, 한유, 장서, 하만리, 최휘지, 최유지 등 구노(九老)가 모여 놀면서 담론한 곳으로서 그 후손들이 1906년 정자를 세웠다고 한다. 정자 아래의 바위에 구로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구로계에 참여한 아홉 분은 우리 최가로 하면, 법 범(範)자로 하면 11대조 두 할아버지 최휘지, 최유지 형제분이 계시고, 흥덕 장씨들 집안으로는 장희, 장덕, 장서 세 분이 해당이 되시고, 진주 하씨 집안에서는 하말리, 하득도 두 분이 계원이시고, 청주 한씨에도 두 분이 거기에 계원이셔요. 청주 한씨들은 오수면 용정리에 사시는 한유, 한빈 두 분이 계시는데, 그래서 아홉 노인이 계를 하셨는데 계명이 구로계예요.”

“계의 날짜는 과거에도 그렇게 하셨다고 합디만은 음력 4월 초승이 좋겠다 싶어서 초아흐렛날을 원정일을(4월 9일) 만들었답니다. 4월 초아흐렛날은 그 곳에서 그내 치르다가 이제는 사성가(四姓家)에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편리한 날에 자기네들이 하고 싶은 날에 통보를 하고 소집을 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오늘은 우천도 그렇고 해서(비가 와서) 내 친동생(최명기)이 최가의 유사를 책임하고 해서 마을회관에 장소를 했으면 좋겠다고 사성가의 어른들하고 상의를 했더니 그도 좋겠다고 해서 오늘 여기서(마을회관) 계가리를 치렀어요.”

“이 마을에도 흥덕 장씨하고 우리 최가 2개 성받이가 있는데 두 성씨들을 제외한 나머지 두 성씨들은 여기 참견을 안 하게 되니까, 술은 남았고 하니까 노소간에 술 한 잔 하시게 오십시오 해서 시방 저쪽 방에 모셔놨어요.”

“회비는 과거에 아홉 어른께서 어떻게 마련하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유래로 내려오는 재정이 좀 있었어요. 그동안 많고 적고간에 그 재정을 잘 운영해 오다 지금으로부터 약 70년 전에 그 재정이 소모, 소비가 돼 버렸어요. 그러니까 그 나머지를 가지고 계가리를 하고 있어요. 계가리를 한 번 치를라면은 사성가에서 어느 정도 분담금으로 알고 거출을 해서 하루 그 일을 넘기게 돼요.”

“연간 1년 1차이기 때문에 한 성받이에 17만원 정도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사되는 사람이 전부 주관을 합니다.”

“유사는 네 성받이에서 그 문중의 상황에 따라서, 형편에 따라서 결정을 합니다. 유사는 네 집 다 있고, 도유사는 따로 있다, 사성가이기 때문에 4년만에 한 번씩 일을 치른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음식 준비는 네 성받이에서 유사가 협의를 해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성씨별 유사의 순서는 연령순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이 고장에 살고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위주로 시키고, 하고 있습니다.”

“계의 운영 상황에 대해서는 앞으로는 무슨 일을 해봤으면 좋겠다고 서로 상의하죠. 오늘도 정기 총회로 알고 모였습니다만 구로계가 창계된 지가 약 390년 정도 됩니다만 그 이전에는 문헌도 있었다고 합니다만 중간에 모두 유실, 분실해 가지고 지금 모다 문헌이 없어졌어요. 문중별로 특이한 사항이 있으면 문중별로 착안을 하고 발의를 해서, 도취해 가지고 구로계에 관한 문헌록을 만들어보자 그랬습니다.”

“문중별로 집안에 보관되어 있는 문헌은 조금씩이라도 있어야 하죠. 다소나마 보관되어 있어야 줄거리를 잡아서 각자 각기 자기 성씨별로 문헌록을 초안이라도 작성을 하지요. 그건 있어요. 우리 최가에도 있고 모두 있어요.”

“구로일소(九老一少)가 있어요. 구로계는 아홉 분이 생일날을 택해서 노셨는데 아홉 명의 늙은 노인과 한 명의 젊은이란 말입니다. 그때 당시 일소(一少)는 시 운자를 지으면서 놀았어요. 전주 이씨의 이문귀 씨죠. 아주 젊은 청년이었어요. 시문도 잘 짓고 학문도 좋았답니다. 그래서 이 구로들이 그 분을 가장 사랑하고 예뻐했어요. 일소는 비회원이지만 아홉 노인들과 어울려서 지내고 놀았어요.”

“구로계가 만들어진 이후에 일소를 합류해서 그 이후 누대를 구로계를 운영해 나왔거든요. 아홉 노인이 구로계를 창계했는데 둔덕방의 한 젊은이를 넣어서 구로일소가 되었어요. 구로일소라는 현판도 있어요. 그 이후에는 구로일소계가 된 것이죠. 합류를 시켜서 구로일소는 사성이 아니라 오성이 된 것이죠. 같은 계원으로 되었는데 무슨 논쟁이 생기고 약간 불목이 생기니까 재정도 이렇게 쪼개져나가고 지금은 일소가 떨어져버렸지. 중간에 들었다가 중간에 떨어져버린 거예요.”

과거 노봉마을의 주요 통행로는 오늘의 도로 상황과는 다른 통로를 이용하였다.

친구 관계

최도범 할아버지의 생존 동창과 기억나는 친구들은 다음과 같다.

“학교 다닐 때 친구들이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은 우리 마을에도 두 사람이 있는데 나하고 갑인 김완식 씨가 있고, 1살 아래인 최승우 씨가 있어요. 그리고 용북중학교 교장 출신인 이정태 선생님은 현재 전주에서 거주하고 있고, 전북 법대를 나와서 도통동에 살고 있는 최성우가 있어요.”

“기억나는 일은 많지요. 그런데 공부를 특별히 잘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1-2명은 서로 견주었어요. 또 그보다는 조금 못한 사람들도 있었지요. 사매면 화정리의 한희상(75세, 일본 동경 거주)씨가 있어요. 내가 듣기에는 남원농고 2년 때 도일을 했어요. 일본 법대를 졸업했는데 조선인이기 때문에 판검사에 임용이 되지 않아서 제과업소를 했답니다. 크게 성공을 해서 화정리에는 그 그늘에 사는 사람들이 많아요. 돈이 많아요. 묘소고 뭣이고 한씨 집안을 개혁을 해버렸어요.”

“화정에 가면 먼저 도의원을 두 번이나 지냈던 한 누가 있어요. 이름이 생각이 안 나네요.”

노래 / 놀이

노래가 요즘은 생활 모습이 바뀌어서 많이 부르지 않고, 또 그 노래도 지역마다 서로 비슷한데 가사만 조금씩 다르다고 최강윤 할아버지께서 이야기한다.

“요새는 모내기도 못줄에 맞춰 하지도 않고, 생활 모습이 달라져서 들노래들이 다 사라졌어요. 노래는 이 양반이 잘 해요. 들노래도 있고 나무노래도 있고. 옛날 노래는 TV에서도 가끔 나오고 허는디 여기에서도 가사만 약간씩 달랐지 다 있었지요. 이 양반이 젊어서 소시적에는 소리가 쩌렁쩌렁해가지고 한 마디씩은 잘 허셨죠.”

최도범 할아버지가 젊어서는 노래를 잘 했다고 말하자 “아 이것을 녹음을 허셨다가 사회에 발표가 되면 챙피허잖아요”라고 말하면서 노래 부르기를 주저한다. 그러자 같이 계시던 최강윤 할아버지께서 이야기를 덧붙이신다.

“예를 들자면 상여소리. 운상할 때 상여소리가 각 지역마다 다르잖아요. 서울 소리 다르고 전라도 소리 다르고 그렇죠. 전라도라도 지방마다 다 틀려요. 고을 따라 다 달라요. 여기는 ‘어아-, 어아-’ 이렇게 나가잖아요. 이 양반이 앞에서 멕이는 소리를 상당히 값어치를 허고 있어요. 그런디 사실상 이런 양반이 작고해 버리먼 소리헐 사람이 없잖냐? 그러먼 딴 마을 가서 사와야 할 것 아니여. 그런디 이런 상황은 딴 마을도 다 마찬가지 일 거예요. 그래서 나는 우리 마을은 녹음기를 사오자, 그래서 생이 앞에다 틀어놓고 가자 했는디, 아 그것도 가만 생각해 본개 안 맞더라고요. 안 맞는 것이 녹음기도 상당히 기술적으로 처음 출발 시점과 맞춰야 허는디 상여라는 것이 한 번 출발하면 장지까지 계속 가라는 법이 없는 것인디, 그리고 가다보면 되니까 쉬었다가 가기도 하고 노제도 여기서는 거리제라고 허는디 거리제도 지내야 하고 하는데 녹음기하고 실제 상황하고는 맞지가 않아요. 그럴 때는 다시 처음으로 되돌려야 되잖아요. 이런 애로점이 있다 하는 것을 고민중이죠.”

“사실상 이 양반이 허리도 못 쓰시제 허니까 아주 고역이예요. 그렇다고 높은 산을 지팽이 짚고 올라갈 수도 없고,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녹음기를 사야 것다 해도 녹음기를 틀어놓고 뒤로 빠구시켰다 허는 것이 문제요. 이런 폐단이 있단 말이요.”

“또 운상 관계도 문제요. 모다 70세 이상인디 그 사람들보고 다 메라고 헐 수도 없고. 비좁은 길을 가기도 허고 외나무 다리를 건너기도 헐 때가 있는데 그것은 아주 기술적으로 가야 허는디, 아주 기술적으로 해야 허는디, 나는 그것이 걱정이예요. 그래서 나는 한 4-5년 전부터 경운기 운상을 허자 이렇게 말했어요. 경운기 운상을 허자고 해도 동네 사람들이 끝까지 반대를 허고, 그러면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 아니냐. 늙은이들끼리 아무리 위친계원이라고 허지만 70먹은 늙은이들끼리 어떻게 허느냐. 그래서 시방 그러고 있는디 이제 저한테 동조해 주는 사람이 2-3명 생겨요. 그렇게 안 헐 수가 없어요.”

“물론 경운기로 허먼 털썩털썩 허죠. 그러면 시신한테 해롭다 허는디 사실상 경운기 천천히 가면 육태로 메는 것보다 더 평화롭게 갈 수가 있거든요. 그런디도 반대를 해요. 구습에 그대로 젖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죠.”

“또 하나 준령도 아 넘는다 그런 거예요. 산줄기를 안 넘으면 어떻게 되느냐? 장씨 선산이 요짝 넘언디 준령을 안 넘을라먼 저쪽 서도로 해서 뺑 잡아 돌아야 해요. 이런 폐단, 이런 것도 해소해얄 것이 아니냐 해서 시방 논란 중에 있죠. 농요, 이 양반이 상당히 조예가 있어요.”

전통적인 생각, 생활 습성이 현대화 되면서 많은 것들이 단절되고 있다. 또 옛날의 이야기는 남에게 자랑거리만 이야기하려고 하지 창피하거나 자랑스럽지 못한 것은 숨기려는 경향이 많다. 그렇지만 자랑거리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고 부끄러운 것도 드러내는 것이 역사적인 자료를 풍부하게 한다는 측면에서는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거듭 말씀드렸다.

“왜 이러 것에 대해서 계속 말씀드리냐면 젊은 사람들은 옛날 생활을 전혀 몰라요. 어르신들은 부모님, 할아버님들의 생활이, 그 생활로 계속 이어져왔는데 지금은 현대화가 되면서 싹 바뀌어버리니까 옛날의 생활이 딱 끊어져요. 그래서 옛날 생활의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좋았던 것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싫었던 것들, 가슴 아팠던 것들 모든 것들을 다 이야기를 해놓아야 나중에 후손들이 알 수가 있단 말이죠. 그래서 저도 일부러 굳은 일 없었느냐고 하는 거예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좋은 일만 이야기하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좋은 일은 내가 이야기하나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나 그 이야기가 서로 다 비슷비슷해요. 그래서 우리가 굳은 일도 자꾸 이야기해야 나중에 우리 후손들이 우리 조상님들이, 선조들이 이런 어려움을 겪으셨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아, 우리 조상님들은 이렇게 좋기만 했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단 말이죠.”

최도범 할아버지께 옛날 노래를 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잊혀진 이야기를 전해주는 중요한 일이라는 거듭된 설득에 조금씩 말문을 트신다. 최도범 할아버지는 그만큼 유교적인 사상, 생활 모습에 철저하신 점을 엿볼 수 있다.

“인(人) 생활이란 것은 사람은 80 평생은 고사하고 70 평생만 살아도 기쁠 희(喜) 자, 희 고놈만 생각하고는 살 수가 없는 것이고, 슬플 비(悲) 자, 희비가 겸해지지 않은 사회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희비가 엇갈려 겸해져야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지, 희비가 없이 희만 가지고 살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해서 비(悲)만 겪고 살 수도 없는 것이고 살아지는 것도 아니요.”

옆에서 같이 한 최강윤 할아버지께서 노래하기가 힘들다면서 최도범 할아버지의 노래 솜씨를 칭찬하신다.

“곡 빼기가 힘들어요. 연세가 많으신디. 목소리가 참 좋아요. 초성이 참 좋아요.”

최도범 할아버지가 노래를 하고 나서 힘이 들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6년 동안 심장병을 앓아오고 있으시기 때문에 숨이 차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심장병이 있어갖고 한 6년 동안을 서울대병원을 다닌디, 술도 자시지 마시오, 커피도 자시지 마시오. 밥허고 김치허고, 고기허고만 자시오 그런디, 내가 되게 다급허먼 안 마시던 소주를 한두잔씩 해요. 왜 요새 작은집 일도 며칠 허고, 우리집 일도 며칠 허고, 넘의 집 일도 하루 허고 했더니, 되게 다급허먼 소주 1/4병-1/5병이라도 먹어야 해요. 왜냐하면 그것을 먹으면 통증을 잊어버려요. 마음의 근심을 잠시나마 잊어버려요. 그래서 요즘에도 할 수 없이 소주를 한 잔, 반 잔 이렇게 해요. 내가 이러다 죽으면 어떻게 허느냐 하고 생각을 해보는디, 사실 인생이란 것을 그렇게 귀중허게만 생각헐 것이 아니요. 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해서 살아가야겠다 요것이 문제제. 그렇게 오래만 사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여.”

이제 ‘서마지기 논배미’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신다.

“여허 - 상사디여 - 서마지기 논뱀이가 반달만큼 남었네

여허 - 상사디여 - 네가 무슨 반달이냐 초생달이 반달이제

여- 여허 - 상사디여 -”

노래 이후 노래를 배우게 된 내력에 대해 말씀하신다. 17살 때부터 10살, 20살씩 더 먹은 마을 어른들과 함께 품앗이를 했는데, 그때 중간중간에 새참을 먹으면서 쉬는 시간에 40살을 더 자신 강재명 어른이 노래를 한 마디씩 가르쳐 주면 따라 부르기 시작했단다.

“서 마지기 논배미 노래를 배우게 된 내력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헐랍니다. 내가 농사의 품앗이, 서로가 오고가고 허는 것은 내가 16살부터 어른들하고 같이 시작했어요. 모내기를 허로 다니다가 17살부터 시작을 했지만 그때는 힘이 조금 모자랐어요. 18살부터, 옛날에는 나락논에 호무질, 호미질을 했었잖애요. 말허자면 논매기지. 내가 18살부터 논매기 호무질을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내가 생각해도 굉장히 조달을 했지. 일찍이 어른들하고 품앗이를 했어.”

“그리고 애들 시절이라고는 허지만 등짐을 허는데 나보다 10살, 15살, 20살씩 더 자신 어른들하고 품앗이를 했어요. 등짐 품앗이를 허면은 산에 가서 나무를 져나르기를 허면은 언제고 어른 나뭇짐을 꼭 같이 지고 다닌개 ‘자가 저러다가 힘을 일찍이 버릴 텐데.’그랬어요. 힘이 쎘어요. 내가 지금 그런 생각을 해요. 내가 지금 허리 아프고, 다리 아픈 것이 그런 영향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시절만 해도, 내가 20살 전후로만 해도 우리 마을에 영감님들이, 우리 일가간에는 말헐 것도 없지만은 타지 성씨들간에도 품앗이를 많이 했어요. 나보다 15-20살 더 먹은 어르신들허고 품앗이를 해보면 ‘앗다-, 앗다-, 오늘은 아무개 앞에서 무엇을 한 가지 갈쳐줘 봐야것다.’그래요. 논에 호미질을 헐 때는 호미 자루가 콱 깨져라 허고 호미 자루를 쥐어버리면은 한참이란 것은 보통이면은 쉴 참을 말하는 것이예요. 아침 때 첫 참을 매고 샛거리가 나와야 해요. 그것을 한참이라고 허는디 한참 동안에는 호미 자루에 가서 물이 안묻어야 헌다. 그 때에 영감님들이 ‘노래 한 마디 배와봐라.’ 그래서 타지 성한테 강재명이라고도 허고 본명은 강수성이라고도 했는디 그 어른한테 배웠어요. 그 분은 나보다 40세가 더 많아요. 그 분은 우리 아버님보다 오히려 한 살을 더 자신 분이예요. 아 그 분이 ‘아, 먼 노래를 허실랑교, 먼 노래를 허실랑교.’ 허면 ‘내가 먼저 헐 테니까 배와봐라. 배와봐라’ 그래요. 그래서 그 아까 농사 노래를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양반들한테 배워놓고 보니까 이 대목은 이렇게 수정허는 것이 좋겄다 허는 생각들이 들어요. 그래서 발음계나 고저를 가는 대목을 수정한 것이 그저 고 정도예요.”

놀이

최도범 할아버지가 학창 시절에 생각나는 놀이는 다음과 같다.

“공적으로는 학교를 다닐 때 일제 말엽이었기 때문에 아동들을 혼달림을 내서 부려먹었어요. 그리고 아동들에게 조선말을 못쓰게 했어요. 주일마다 점검을 하는데 조선말을 쓰다가 한 번 걸리면 한 번 썼으니까 합수통, 분항, 분소매를 1통 퍼내라 하고, 3번 쓰다가 걸리면 3통을 퍼내라고 했어요. 이런 식으로 학교에서 못살게 굴었어요. 조선말을 쓰면 합수통을 퍼냈어요. 애기 때였어도 퍼냈어요.”

“내가 9살 때 입학을 하니까 늦은 줄 알았는데 늦은 게 아니였어요. 10살, 12살 먹은 사람들도 그 당시에 입학을 했어요. 그러니까 사매소학교 6학년 때 결혼하는 사람도 명 있었어요. 19-20살이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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