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7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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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丁基燮 |
영어공식명칭 | Jeong Giseop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대열 |
출생 시기/일시 | 1886년 7월 17일 - 정기섭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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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3일~1919년 3월 14일 - 정기섭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평내리에서 3·1운동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5월 8일 - 정기섭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선고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6월 28일 - 정기섭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개월 선고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8월 18일 - 정기섭 고등법원에서 징역 6개월 선고 |
추모 시기/일시 | 2016년 - 정기섭 대통령표창 추서 |
출생지 | 평내동 -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3·1운동 |
[정의]
경기도 남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정기섭(丁基燮)[1886~?]은 1919년 3월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에 해당하는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평내리에서 태어났으며 1919년 3·1운동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다.
[활동 사항]
1919년 경성의 3·1운동 소식을 들은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평내리 구장 이승익(李昇翼)은 1919년 3월 13일 동리 주민들을 박모 씨의 집에 소집하여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독립 만세 운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배포한 고유문(告由文)을 낭독하여 독립 만세 운동을 촉발하였다. 당시 정기섭은 우보현(禹輔鉉)·이보영(李輔永)·김영하(金永夏)·이석준(李錫俊) 등과 함께 시위를 이끌어 나갔다.
다음 날인 1919년 3월 14일 100여 명의 시위대는 독립 만세 운동을 벌이며 면사무소가 있는 미금면 금곡리[현 남양주시 금곡동]까지 행진하였다. 일본 헌병이 해산을 권유하였지만, 조선 독립 만세를 부름이 마땅하지 않느냐고 저항하며 독립 만세 운동을 계속하였다.
독립 만세 운동 이후 일본 경찰에 체포된 정기섭은 주모자로 몰려 모친 고초를 겪었다. 1919년 5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을 이유로 이승익에게 징역 10개월, 우보현·이보영·정기섭·김영하·이석준에게 징역 6개월을 선고하였다.
이에 이승익과 우보현·이보영·정기섭·김영하·이석준은 공소하였지만 1919년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 판결을 하였다. 이후 이승익과 우보현·이보영·정기섭·김영하·이석준은 다시 상고하였지만, 1919년 8월 1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판결을 하여 형이 확정되면서 복역하였다.
[상훈과 추모]
정기섭에게 2016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