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882
한자 朝鮮 時代
영어공식명칭 Joseon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왕무

[정의]

1392년 조선 왕조 개국기부터 1863년까지 경기도 남양주시의 역사.

[개설]

지금의 남양주 지역은 조선 왕조의 건국과 더불어 역사적 정체성이 확립되기 시작했다. 왕조의 수도인 도성이 한양에 세워지면서 남양주의 행정 구획과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시설들이 설정되었다. 남양주의 일부 지역에 도성이 설치되어 행정 단위의 재정비와 관방 및 교통의 재구축이 이루어지면서 오늘날 남양주시의 외형이 확립된 것이다. 남양주시의 기원이었던 경기도 양주가 도성의 동부에 위치한 도호부로 기능하고 태조의 건원릉이 안치되면서 왕실의 대표 능원으로 정립되어 현재까지 지역적 위상이 이어지고 있다.

[지리와 경계]

조선 전기의 대표적 지리지인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남양주는 “동쪽으로 포천에 이르는 18리, 서쪽으로 원평(原平)에 이르는 22리, 남쪽으로 광주에 이르는 47리, 북쪽으로 적성에 이르는 83리”의 지역에 있었다.

이후 중종 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동쪽으로 “포천현(抱川縣) 경계까지 25리이고, 또 같은 현 경계까지 22리가 되기도 하며, 가평현(加平縣) 경계까지는 29리이고, 광주부(廣州府) 경계까지 75리이다. 남쪽으로는 광주부 경계까지 67리이고, 또는 82리가 되기도 한다. 서쪽으로는 고양군 경계까지 40리이고, 파주(坡州) 경계까지는 33리이다. 북으로는 적성현(積城縣) 경계까지 22리이고, 마전군(麻田郡) 경계까지 58리이며, 연천현(漣川縣) 경계까지 74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56리”라고 하였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 지리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동쪽으로 포천 경계까지 30리, 가평 경계까지 110리. 도성까지 60리, 서쪽으로 파주 적성 경계까지 30리, 북쪽으로 연천 경계까지 70리, 영평 경계까지 70리, 동남쪽인 광주 경계까지 60리, 양근 경계까지 150리, 지평 경계까지 180리, 서남쪽인 고양 경계까지 40리”라고 하여, 도성과 인접한 경기 동부 지역이었음을 보여 준다. 지역의 서북쪽은 불암산, 수락산, 천마산 등으로 경계를 이루며 동남쪽은 한강으로 둘러져 있었다.

[행정과 군사 체제]

1395년(태조 5) 한양부(漢陽府)를 고쳐서 한성부(漢城府)라 하고, 아전들과 백성들을 견주(見州)로 옮기고 양주군(楊州郡)이라 개칭하였다. 조선 왕조의 지방 제도는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아래에 종2품의 부, 정3품의 대도호부와 목, 종4품의 군, 종5품과 6품의 현 등으로 행정을 구획하였다.

왕조의 행정 체제를 보여 주는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외관제에 경기도는 목 4개, 도호부 7개, 군 7개, 현 19개로 구성되었으며, 양주도 그 편제에 따라 정비되었다.1397년(태조 7) 양주군에서 양주부가 되었으며, 1410년(태종 10) 양주목으로 승격되었다가, 1413년(태종 13) 양주도호부로 되었다. 1466년(세조 12) 양주목으로 재차 승격되었다가, 1504년(연산군 10) 국왕의 사냥터를 만든다는 명분으로 양주목을 폐지하였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이후 양주목으로 복구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호수(戶數)가 1,481호, 인구가 2,726명,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33명, 선군(船軍)이 132명이라고 하였다. 또한 역이 6개, 목장이 2개, 봉화 2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1457년(세조 3) 진관체제의 정비로 인해 거진(巨鎭)이 설치되었으며, 도성의 후보(後輔)가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주(州) 1개, 군(郡) 1개. 현이 5개였다. 왕조의 후대로 갈수록 건원릉을 중심으로 하는 왕실 능침이 증가했으며, 그에 대한 관리 체제가 증설되었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양주목사 고언백(高彦伯)이 검암산(劍岩山)을 근거지로 하여 왜군과의 전투를 승리하고 왕릉 및 지역을 고수하였다. 경기 좌방어사(京畿左防禦使) 변응성(邊應星)은 용진(龍津)을 근거로 하여 한강 중심의 방어선을 수비하여 지역민의 안돈을 유지하였다. 남양주의 군제는 전쟁의 여파 속에서 중앙의 군사 제도인 5군영과 지방의 군제인 속오군(束伍軍) 체제에 의해 재편되었다. 5군영 체제에서 남양주는 한강을 통한 교통로의 방어를 전담하였다. 남양주의 한강 교통 요지 중에 용진은 조선 초기부터 남한강과 북한강의 합수 지점에 있어서 전략적 거점이었다. 용진은 왜군이 도성으로 침략하던 와중에 거쳐간 격전지였으며, 남양주 군인들이 왜군에 대항하기 위해 훈련하고 주둔하던 것이었다. 미음진은 광주 이남과 영서 지역의 교통을 관할하였다.

[경제와 산업]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간전(墾田)이 1만 5190결(結)이라고 했으며, 1759년(영조 35)에 간행된 『여지도서』에 전답(田畓)이 1만 160여 결이지만, 실결수는 3,013여 결이라고 하였다. 전란을 전후하여 실결수의 차이가 나타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에 적합하다고 했다. 『여지도서』에는 지역의 산업이 농업과 잠업이며, 빈한한 사람들이 상공업에 종사한다고 하였다.

[문화]

조선 전기에는 고려 시대부터 유래한 사찰 중심의 문화가 유지되었으며, 성리학 공부를 위주로 하는 석실서원 등이 증설되면서 유학 중심의 문화가 정비되었다. 석실서원은 남양주 양반 사족의 문화 활동 중심지로서 미호 인근 향촌의 인물을 양성하는 거점이 되었다. 또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왕릉들이 증설되었으며, 그에 따른 유교적 의례도 지역 문화로 정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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