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08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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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興寺址 |
이칭/별칭 | 신흥사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관인면 중리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김의경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6년 9월 - 신흥사 터 단국 대학교 사학과에서 발굴 조사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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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8년 4월 - 신흥사 터 단국 대학교 사학과에서 발굴 조사 종료 |
소재지 | 신흥사 터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관인면 중리 |
성격 | 절터 |
지정 면적 | 약 4,958.68㎡[1,500평] |
[정의]
경기도 포천시 관인면 중리에 있는 고려 시대 절터.
[변천]
신흥사 터의 정확한 창건 연대나 성립 후의 활동은 알 수 없으나, 신흥사 터에서 발견된 석조 여래 좌상은 고려 중기의 양식을 띠고 있어서 고려 중기부터 절이 있었던 것으로 예상할 수 있으며, 6·25 전쟁 이전까지 절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다만 존재 형태나 규모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확인할 수가 없다.
[위치]
신흥사 터는 포천시 관인면 중리에 위치한 보가산성을 지나 죽동을 향해 오르는 군용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신흥사와 관련된 조사 기록은 1942년 발간된 조선 총독부의 『조선 보물 고적 조사 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처음 나타나며, 1977년 발간된 문화재 관리국의 『문화 유적 총람』 자료에도 신흥사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지만 정확한 발굴 조사는 1997년경 단국 대학교 사학과에 의해 이루어졌다. 발굴 조사에 대한 기록으로 확인하였을 때, 따로 출토된 유물은 확인할 수 없으며 신흥사 터 석조 여래 좌상이 남아 있다.
신흥사 터에 대한 발굴 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흥사 터는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장방형 형태로 약 4,958.68㎡[1,500평] 규모로 추정된다. 사역(寺域)에는 건물 터의 초석, 석탑재 및 팔각형의 불상 대좌가 남아 있다. 초석은 73×73×20㎝ 크기로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의 판판한 면을 상면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각 주간 거리는 2.5m이다. 현존하는 초석의 상황으로 보아 남북을 장축으로 하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탑재 및 불상의 대좌는 2개소에 중첩되게 놓여 있다. 이 중 탑재는 탑신석 1기와 굽형 괴임대 형식의 초층 탑신 받침이 있는 상대 갑석 1기가 현존하고 있다.
탑재는 한 변 길이 34.5㎝, 높이 23㎝ 크기로 좌우에는 양 우주(兩隅柱)가 모각되어 있다. 상대 갑석 부재는 네 모퉁이가 모두 파손되었는데, 상면에는 하단이 호형(弧形)으로 내반되었고, 상면에 평평한 한 변 40㎝ 크기의 굽형 괴임대가 갑석과 한 돌로 조출(造出)되어 있다. 석불의 부재로는 팔각형의 하대석 및 중대석과 또 다른 팔각형의 부재 등 모두 3기가 남아 있다.
하대석은 지름 90㎝, 높이 40㎝ 크기로, 각 면에는 좌우로 벌어지는 3괄호형의 안상이 1구씩 조식되어 있다. 현재는 2판의 복엽 복판 복연(複葉複辦伏蓮)만이 남아 있는데, 상태로 보아 본래는 8판의 연화문이 조식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상단에는 각형 2단의 받침이 조출되어 있다. 하대석의 상면에 놓인 중대석은 평면 8각형으로 지름 49㎝, 높이 16.5㎝ 크기이다. 파손이 심하여 4면에서만 원형을 볼 수 있는데, 각 면의 모서리에는 너비 3.5㎝의 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또 다른 팔각형의 부재는 앞서 서술한 탑재의 하단에 매몰되어 있다. 평면 팔각형으로 높이 20㎝, 한 변 길이 53㎝ 크기로 각 면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다. 사역은 이 같은 석조물이 있는 지역으로부터 남쪽으로 연장되고 있다. 절터의 동쪽에서는 남북 방향의 기단 석렬이, 남쪽에서는 남북 방향의 기단 석렬이 노출되어 있다.
신흥사에 대한 일제 강점기 자료에 의하면 “신흥사 터는 초석 사이가 동서 약 50간, 남북 약 40간에 이르고 옛 기와 조각이 보인다[新興寺址卜稱シ東西約十五間南北約四十間礎石及古瓦片見當ラス]”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1977년에 발간된 『문화 유적 총람』에는 “보가산(保架山) 절터 또는 심원사지(深原寺址)라고도 하며 고려 초부터 6·25 전쟁 이전까지 있었다고 전하는데, 사지(寺址) 약 93평[307.44㎡]에 주초석[39×39㎝] 1개와 목과 우지(右脂)가 파손된 석불 좌상[흉폭 43㎝, 좌고 61㎝] 1구가 있다”는 기록은 비록 근세의 것이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다른 문헌에서 기록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일찍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존하는 석탑과 석불 대좌가 비록 파괴되기는 하였지만 일부 양식으로 보아 고려 초에 건립된 사찰로 추정된다. 아울러 신흥사 터 석조 여래 좌상은 포천 밖으로 이반되었으나, 서청담 승려가 1997년에 찾아왔다고 한다. 현재 시멘트로 조성한 대좌에 봉안되었으며, 머리는 새로 만들었다. 우견 편단(右肩偏袒)의 법의를 착용하였는데, 가슴과 팔에서 희미한 옷 주름을 볼 수 있고, 배면에는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둔부에 이르기까지 4조의 음각된 의문이 사선형으로 표현되어 있다. 왼손은 신체의 선을 따라 내려 오른쪽 무릎에서 외장하였고, 오른손은 파손되어 시멘트로 보수하였으나 가슴에서 내장한 것으로 보인다.
어깨에 비해 가슴이 넓게 조성되었고, 가슴의 선은 하단부로 내려올수록 돌출되어 배가 부른 형상을 보이고 있어 불균형한 구도를 보이고 있다. 전체적인 양식을 볼 때 고려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흥사 터 석조 여래 좌상의 실측치는 현재 높이[머리 제외] 55㎝, 어깨너비 50㎝, 가슴너비 30㎝, 무릎 너비 70㎝, 무릎 높이 40㎝이다.
[현황]
현재 신흥사 터는 굿당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장방형의 형태이다. 현재 굿당 컨테이너 왼쪽 석축부 주변에 남북 3칸, 동서 1칸 규모의 건물 터 1동이 있으며, 컨테이너 북쪽 사역 경계부에서 담장 터가 확인된다. 사역 내에는 팔각 연화 대좌 2기, 팔각 탑신석 1매와 치석된 판석 부재 등이 있다. 신흥사 터 석조 여래 좌상은 인근에 신축된 신흥사로 옮겨 봉안되었으나, 신흥사가 폐사되어 펜션으로 이용되면서 펜션 뒷마당에 방치되어 있다. 석탑재와 석불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 초에 창건되어 조선 시대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변에 기와 조각 등이 산재하고 있다.
신흥사 터 앞쪽에는 작은 계곡이 있어 많은 유람객이 찾고 있다. 전 지역에는 낙엽송이 촘촘히 심어져 있는데, 법당 터로 추정되는 지역에는 지금도 플라스틱 불상 1구 및 촛불을 밝혔던 흔적이 있는 점으로 보아 현재도 불공을 드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