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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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沈通源 |
이칭/별칭 | 사용(士容)/욱재(勖齋)/만취당(晩翠堂)/심상공(沈相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전병무 |
출생 시기/일시 | 1499년 - 심통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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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572년 - 심통원 사망 |
묘소|단소 | 심통원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무림리 산41 |
신도비 | 심통원 신도비 -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청송(靑松) |
대표 관직 | 좌의정 |
[정의]
경기도 포천지역에 묘가 있는 조선 전기 문신.
[가계]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사용(士容), 호는 욱재(勖齋)·만취당(晩翠堂), 별칭은 심상공(沈相公). 조선 개국 공신 심덕부(沈德符)의 5세손으로, 고조할아버지는 세종의 장인인 심온(沈溫)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영의정 청송 부원군 심회(沈澮)이고, 할아버지는 판관 심원(沈湲)이며, 아버지는 장령 심순문(沈順門)이다. 4형제 중 막내아들로 첫째 형은 영의정 청천 부원군 심연원(沈連源)이다. 첫째 형의 아들은 명종의 장인 청릉 부원군 심강(沈綱)인데, 자식으로 명종 비가 된 인순 왕후(仁順王后)와 8명의 아들을 두었다. 훗날 서인(西人)의 영수인 청양군 심의겸(沈義謙)과 청림군 심충겸(沈忠謙) 등이 대표적이다. 둘째 형은 기묘명현(己卯名賢)에 책록된 심달원(沈達源)이고, 셋째 형은 동지돈령부사 심봉원(沈逢源)이다. 셋째 형의 아들은 심건(沈鍵)인데, 그 아들이 좌의정 청성 부원군 심희수(沈喜壽)이다. 심통원(沈通源)[1499~1572]의 부인은 정경부인 완산 이씨(完山李氏)이고, 아들은 심뇌(沈鐳)와 심화(沈鏵)이다.
[활동 사항]
심통원은 심순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기억력이 뛰어나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1519년(중종 13) 생원시에 13등으로 합격하였으나, 이후 문과에는 여러 번 낙방하였다. 1537년(중종 32) 별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1543년(중종 39) 세자시강원 필선으로 경연에서 행한 강론이 바르지 못하다고 탄핵을 받았다.
1546년(명종 1)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응교로 등용된 뒤 경연 시강관으로 있다가 홍문관 직제학이 되어 조정의 공문서를 책임졌다. 1547년(명종 2) 병조 참지·승정원 동부승지를 거쳐 이듬해 우부승지·좌부승지·우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49년(명종 4) 승정원 좌승지로 있다가 경상도 관찰사로 잠시 지방에 내려갔다. 1550년(명종 5) 예조참판에 임명되었고, 이후 대사헌·형조참판·한성부 판윤을 거쳐서 1557년(명종 12) 공조판서에 올랐다. 1558년(명종 13) 예조판서 등으로 옮겼다가 명나라에 동지사로 파견되어 연경(燕京)에 다녀왔고, 곧 의정부 우찬성으로 승진하였으며, 이듬해 좌찬성을 지냈다.
1560년(명종 15) 이조 판서로 있다가 우의정에 제수되어 정승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왕의 외척으로 또 다른 외척인 윤원형(尹元衡) 등과 경쟁하면서 권세를 누렸다. 1564년(명종 19)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565년(명종 20) 윤원형 등과 함께 권력 남용과 뇌물을 받은 혐의로 삼사(三司)의 탄핵을 받아 좌의정을 사직하고 영중추부사로 옮겼다. 이후 약방 도제조를 겸임하며 명종 사후 후사를 세우는 일까지 관여하였다. 선조가 즉위한 1567년 과거의 행실로 인하여 삼사의 탄핵을 받아 삭탈관직당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내졌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무림리 산41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1575년(선조 8)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에 신도비가 건립되었다. 심통원 묘와 함께 포천시 향토 유적 제16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