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2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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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商業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집필자 | 정진각 |
[정의]
경기도 포천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영리를 목적으로 한 물품 매매업.
[개설]
18세기 중엽까지는 농촌과 도시의 재화 유통이 주로 당사자 간의 직접 교환에 의한 물물 교환이 주를 이루었다. 이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까지는 상행위가 전문화하는 단계였고, 이와 함께 모든 산업은 이윤 추구를 목표로 하였다. 20세기 독점 자본주의 단계에 돌입하자 자본주의의 제반 모순이 격화되어 종래의 영리주의에 대한 반성이 요청되었다.
경기도 포천시의 위치는 예로부터 상행위에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현재는 남북 분단으로 그 빛을 잃었지만 예전부터 서울을 거쳐 금강산 자락의 강원도 고성으로 이어지는 남북 관통 통로로서 서울에서 강원도 북쪽과 함경도를 가려면 꼭 거쳐 가야 하는 곳이었다.
옛 문헌에는 포천의 안기역은 “서울에서 북쪽으로 오는 자는 양주를 지나서 반드시 여기에 유숙한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조선 후기 물류 유통이 발달하고 장시가 활성화되면서 이 길은 동북 지역 물자 수송로의 거점이었고, 이에 따라 포천의 장시는 당시 중간 물류 센터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 발달하기 시작한 송우리장은 함경도 지역에서 들어오는 북어의 매점 매석 장으로 특히 유명하였다.
[변천]
1. 고대
재화 유통의 가장 오래된 형태는 부족 간의 물품 교역으로 자급자족의 영역을 넘어 잉여 제품을 제공하는 대가로 다른 부족으로부터 귀한 물품을 획득하고자 하는 어떤 형태의 상행위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 고대 사회에도 장시(場市)가 생기기 이전에 이미 행상이 행해졌으리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2. 고려 시대
고려 시대 경기도 포천 지역의 상업은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으나 주로 행상인들에 의해 지방 향시를 통해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향시(鄕市)에서는 물물 교환의 원시 경제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주로 곡물과 축산물 중심의 상행위가 소규모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3. 조선 시대
조선 시대 지방의 상업은 주로 시장을 무대로 하여 이루어졌다. 즉, 향시로 불리는 시장을 중심으로 한 지방 경제가 곧 조선 지방 경제의 특질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시대에 향시는 전국에 약 1,000여 개소가 있었다. 『만기요람(萬機要覽)』에 의하면 순조 때 경기도에 102개소, 충청도에 157개소, 강원도에 68개소, 황해도에 82개소, 전라도에 214개소, 경상도에 276개소, 평안도에 134개소, 함경도에 28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향시들을 중심으로 행상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교환 경제를 매개하는 전문 시장 상인은 보부상이었다. 보부상은 대개 1일 왕복의 노정을 표준삼아 형성되어 있는 시장망(市場網)을 순력하면서 각 지방의 물품 교환을 촉진시켰다. 주로 같은 경제권역 내에서 생산된 물화가 같은 경제권역 시장망을 통해 유통 교환될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상업이 활성화되면서 발달한 사상 도고(私商都賈)를 중심으로 서울 주변에 송파(松坡)·누원점(樓院店)·경강변(京江邊) 등과 같은 상업 중심지들이 발전하였다. 경기도 포천의 송우점(松隅店)도 그중 하나였다. 이곳에 사상 도고가 발달한 요인으로는 지방 생산품이 서울로 운반되는 길목이었다는 점, 시전의 금난전권이 적용되는 범위 밖에 있으면서도 비교적 서울과 가까워 서울 시내 사상 도고와의 연결이 쉬웠다는 점, 서울의 사상 도고가 직접 이 곳에 나와 상품을 매점할 수 있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당시 경기도 포천군 내의 주막거리에 있었던 송우점은 어물, 농우(農牛), 포(布)등의 북부 지방 산물들이 누원으로 오기 전에 거처야 하는 북쪽 관문이었다. 그 경로를 보면 생산지 상인과 중간 경유지인 강원도 통천의 상인, 그리고 송우점을 근거지로 하는 상인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이들에 의해 운반된 상품은 마지막에 서울의 상인들에게 넘겨졌다.
4. 현대
현대에 들어서면서 경기도 포천 지역에는 포천장과 송우장, 그리고 영중, 영북, 관인, 이동, 일동, 내촌의 장시들을 합해 모두 8개 장시가 형성되었다. 이중 포천장은 옛 장터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민속장이자 민족의 숨결이 담겨져 있는 풍속 가운데 대중성이 가장 강한 장시로서 오래전부터 만남의 장소, 집회의 장소, 또는 물류 교류의 장으로 이용되면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포천장은 1980년대에 신읍동 도시 발전에 밀려 포천천 고수부지인 군내면 구읍리 소재 하천을 따라 이전 정착되면서 잠시 대형 마트에 밀려 규모가 위축되었다. 그러나 다시 규모가 커지면서 현재는 약 300여 개의 비상설 점포가 자리를 잡고 있으며 5일마다 장이 열리고 있다. 포천장은 수북이 담긴 장바구니에서 훈훈한 인심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 산지에서 직접 수확한 산나물과 곡류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타 지역에 비해 싼 가격에 물품을 구입할 수 있어 현대식 대형 마트만큼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경기도 포천은 수도권에 인접해 있으나 6·25 전쟁의 격전지였을 뿐만 아니라 군부대가 많은 지역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 통제로 인해 자유로운 상업이 발전하기 어려운 여건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었다. 1990년대 들어 우리나라 전반에 불어 닥친 경기 활성화 및 남북 화해 무드와 함께 경기도 포천 지역의 상업도 다소 활기를 띠기도 했으나 아직은 답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기도 포천은 통일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옛날과 같은 상업적 영화를 누릴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을 갖추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