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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의병 활동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290
한자 一八九五年義兵活動
영어공식명칭 Activities of the Righteous Armies in 1895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강원도 삼척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청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6년 4월 19일연표보기 - 관동 의병의 삼척 전투 발생
성격 사건

[정의]

조선 후기 관동 의병의 삼척 전투.

[개설]

1896년 4월 삼척에서 벌어진 관동 의병과 관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역사적 배경]

일제의 침략에 따른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대하여 발생하였다.

[경과]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뒤따른 제도의 변혁과 일제 침략에 항거하여 척사위정(斥邪衛正)의 민족 사상과 국권 수호의 구국 이념을 강령으로 하여 전국에서 의병이 궐기하자 삼척에서도 창의장(倡義將) 김헌경[1851~1910], 서기 김달호(金達鎬) 등 유림 중심으로 항일 의병이 일어났다. 이때 원산 공략을 위한 병력을 모으기 위하여 삼척까지 온 관동구군도창의군이 원산 공략에 실패한 후 삼척까지 후퇴하여 삼척 의진(義陣)[의병부대]과 힘을 합쳐 관동 의병의 마지막 대전투인 삼척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결과]

연합 의진은 삼척읍성과 갈야산(葛夜山)[178m] 일대에 진을 치고 곧 닥쳐올 경군(京軍)[조선시대 중앙군]과의 싸움에 대비하였다. 전투에 앞서 민용호(閔龍鎬)[1869~1922]는 같은 민족끼리 싸울 수 없다며 몇 번이고 싸우지 말 것을 호소했지만 끝내 듣지 않아 결국 일대 혈전을 치르게 되었다.

관동 의병은 3개 지역으로 나누어 진을 쳤다. 읍(邑) 뒤의 삼봉산[갈야산, 그 서쪽의 높은 봉과 북쪽의 봉, 3개 봉을 이름]에는 민용호를 비롯하여 최중봉(崔中奉), 강우서(姜禹瑞), 이영찬(李永燦)[?~1896], 전치운(全致雲), 신무섭(申懋燮)[?~1896] 등의 본진이 호를 파고 매복해 있었다. 읍성에는 선봉장 김도현(金道鉉)[1852~1914]과 민동식(閔東植), 한중보(韓重輔) 부대가 잠복해 있었다. 죽서루(竹西樓) 동쪽[남산]에는 김헌경, 김달호, 주명승(朱明昇)의 삼척 의병이 진을 치고 있었다. 마침내 관군이 시내로 쳐들어오자 매복해 있던 의병들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니 마침내 삼척 대전이 시작되었다.

1896년 4월 19일 묘시[오전 5~7시]에 시작되어 신시[오후 3~5시]까지 이어진 대 혈전이었다.

알개방재[謁介岩, 갈야산과 그 북쪽 산봉 사이]는 피차간 사상자가 많아 피바다가 되었고, 읍성 안은 불바다가 되었다. 탄알이 떨어진 의병들이 오십천으로 후퇴하자 이 기회를 놓칠세라 경군들이 성 안으로 들어와 불을 질러 불꽃이 온 하늘을 찌를 듯이 타올랐다.

민용호는 따르는 군졸들과 함께 오십천을 따라 황지령(黃池嶺)[통리재]을 넘어 정선으로 가고, 영양 의병장 김도현도 따르는 군졸들과 함께 고향인 영양으로 돌아갔다. 삼척 창의장 김헌경과 서기 김달호는 붙잡혀서 관군에게 문초를 받은 후 왕의 조칙에 의해 풀려 나왔지만 관군은 북평으로 가서 김헌경의 집을 불태웠다. 삼척의 대전은 승패가 없었다. 모두의 패전으로 끝났다. 200명의 관군도 50명이 살아서 강릉으로 돌아갔다. 의병도 통의장(統義將) 김건필(金乾弼)을 비롯하여 많은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삼척 전투에 참전한 영양 의병장 김도현의 자서전인 『벽산선생창의전말(碧山先生倡義顚末)』 가운데에서 삼척 전투에 관해 기록한 부분만 소개한다.

“중군 최중봉은 뒷산에 진을 치고 민 대장은 본읍 군대와 함께 남쪽 산에 진을 치고 나는 민동식, 한중보와 함께 성 안에 진을 쳤다. 웅덩이를 파고 군사를 매복하고 있으려니 조금 후에 저쪽 군대들이 먼저 대포를 쏘아 포 소리가 천둥소리와 같고, 탄환은 우박과 같이 쏟아진다. 나는 성을 돌보면서 격려하노라니 맨 앞 진이 약철(藥鐵)[화약과 철환]이 다 떨어졌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제일 날쌘 포정 5명을 데리고 남쪽 산으로 가서 약철을 지고 도로 뒷산으로 돌아왔다. 이때 진중에서 한 사람이 큰소리로 ‘약철을 빨리 가져 오너라’ 한다. 적군들이 이 말을 듣고 승세하여 연달아 포를 쏘니 진중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또 앞 진은 이미 흩어져 달아났고, 산성에 매복한 복병도 역시 놀라 달아났다. 남쪽으로 돌아오니 군사가 겨우 50명밖에 되지 않았다. 길에서 장참모(張參謨), 박진사(朴進士)와 포정(砲丁) 몇 명을 만나 함께 평릉(平陵)[평릉도 찰방이 있는 근덕 교가]으로 지났으나 민 대장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의의와 평가]

삼척 의병은 관동 의병의 원산 공략에도 참여하였고, 관동 의병의 대규모 전투로서는 마지막 전투라 할 수 있는 삼척 전투를 이끌었다. 비록 삼척 전투는 실패하고 말았지만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일어나 일제라는 외세를 몰아내기 위한 구국 항일 운동이었다는 역사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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