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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보통학교 3.1 만세 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292
한자 三陟普通學校三.一萬歲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강원도 삼척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청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4월 15일연표보기 - 삼척보통학교 3.1만세 운동
발생|시작 장소 삼척보통학교[현 삼척초등학교] 교정 - 강원도 삼척시 교동로 43 지도보기
성격 항일 운동

[정의]

일제강점기 삼척보통학교 학생들에 의한 만세 운동.

[개설]

삼척보통학교 5회 졸업생인 김순하가 독립선언문을 몰래 가지고 와서 재학생 김달하에게 전달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사건이다.

[역사적 배경]

일제의 가혹한 식민 통치에 대한 불만과 고종 황제의 독살설에 대한 울분 및 민족자결주의에 따른 영향에서 발생하였다.

[경과]

1919년 4월 15일 삼척보통학교[지금의 삼척초등학교] 학생들이 김기덕(金基德) 선생의 지도 아래 김달하(金達河), 오원모(吳元模), 심부윤(沈富潤), 정석대(鄭錫大), 김치화, 김봉호, 홍동균 등 학생 대표와 함께 운동장에 모여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조국의 독립을 갈망하는 독립만세를 일제히 외치는 일이 발생하였다. 독립선언문은 삼척보통학교 5회 졸업생이자 서울에서 유학하고 있던 북삼면 효가리[현 동해시]에 사는 김순하(金舜河)가 고향으로 내려오면서 신발 속에 숨기고 와 후배인 재학생 4학년 김달하에게 은밀히 전달한 것이었다. 김달하는 하루 전날인 4월 14일 심부윤, 오원모 등과 협의하고 거사 계획을 세웠다.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자 삼척보통학교 교장 야마다[山田]는 이른바 천황의 칙어(勅語)를 옷에 감추고서 뒷산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이들의 만세 시위는 곧이어 들이닥친 일본 헌병들의 출동으로 운동장 안에서 끝났다. 그러나 당시 강원도 장관에게 보고한 자료에 따르면 176명의 생도가 참가하는 등 규모가 상당히 컸다. 또 당시 94명의 학생을 훈계 처분하였다는 강원도 헌병대장의 보고에 따르면 규모뿐만 아니라 만세 운동에 전교생 대부분이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삼척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 운동을 벌인 것은 오후 1시 20분이었다. 운동장에서 만세 소리가 터져 나오고 이 소리가 읍내에 퍼져나가면서 일반인도 크게 자극을 받았다. 이날은 음력 3월 5일이라 삼척김씨의 시조 춘계전사일(春季奠祀日)이었다. 약 300명의 춘계전사일 참가자들도 이 소리를 듣고 시위를 벌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를 미리 눈치 챈 헌병의 출동으로 해산해야만 하였다. 이날의 만세 시위는 강원도 장관의 보고에 천도교의 주동으로 일어나려 하였다는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당시 학적부를 열람한 결과 전체 학생 수 183명 가운데 176명이 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전교생이 참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김기덕 교사의 지원을 받았다고 하지만 직원 명단에는 김기홍(金基弘)으로 되어 있다.

특히 북삼면 효가리에 있는 학생 김순하가 서울에서 고향으로 내려오면서 신발 안에 숨겨 온 독립선언문을 삼척보통학교와 송정보통학교 학생들에게 전한 것이 직접 동기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주동 학생 김달하는 4학년생이고, 심부윤·오원모는 2학년에 재학하고 있었다. 당시는 4년제 보통학교였기 때문에 김달하는 최고 학년이었다. 1903년 2월 30일 생으로, 운동 당시 만 16세의 학생이었다. 지금의 중학생에 해당되는 나이로 독립 만세 운동을 벌였으니 당시 우리 민족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 민족이 독립을 갈망하고 저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삼척 지역에는 학생 중심으로 독립 만세 운동이 벌어졌다. 이는 구한말 의병 활동에서 다져진 항일 풍토, 애국 계몽 운동, 민족주의, 근대 자유주의 사상 등이 간접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었다. 직접 원인으로는 당시 일제의 농촌 경제 수탈, 관리 횡포, 고종 황제 독살설 등으로 반일 감정이 고조되어 있는 상황에서 서울의 3·1운동에 영향을 받은 학생들에 의해 전개된 것이었다.

이후 삼척보통학교의 학생 운동 정신은 1921년 태평양회의 때의 시위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주동 역할을 한 심부윤, 정석대 같은 학생들은 졸업 후 사회에 진출하여 1930년대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하면서 항일운동에 주도 역할을 하게 된다.

[결과]

삼척보통학교의 만세 운동은 북삼면송정보통학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기록에 나타난 것은 없지만 6.25 전쟁 후 삼척교육감을 지내면서 삼척향토지(三陟鄕土誌)를 편찬한 김정경(金鼎卿)의 증언에 따르면 1919년 4월 17일 주하영(朱夏英), 김진수(金振壽), 홍학현(洪學鉉)등이 협의하여 오후 2시에 50여 명의 학생들이 만세를 불렀다. 이 때문에 학생들이 직원실에 끌려가서 일본 헌병의 모진 취조를 받았다. 송정리최만희(崔晩熙)의 증언에도 북삼면 송정리김형국(金炯國)과 효가리홍순황(洪淳璜)이 만세 운동을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후 마을에서는 홍순황을 만세 할아버지로 불렀다고 한다.

삼척보통학교의 만세 운동은 또한 1921년 태평양회의 때의 시위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의의와 평가]

당시 사건의 주요 인물들이 훗날 성인이 되어 1920년대 후반에서 길게는 광복이 될 때 무렵까지 사회운동을 이끌어 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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