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3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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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鳥致院堤防工事 |
이칭/별칭 | 조천 개수공사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윤철원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24년 - 조치원 제방공사 착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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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26년 - 조치원 제방공사 준공 |
발단 시기/일시 | 1427년(세종 9) - 연기현감 허만석이 조천에 제방 축조 |
전개 시기/일시 | 1924년 10월 07일 - 조천 개수공사 기공식이 조천교 인근 언덕에서 개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7년 02월 10일 - 제방공사에 소요된 예산 36만원 |
발생|시작 장소 | 조천 제방 - 연기현 북쪽 15리 지점 청주 경계 |
종결 장소 | 조천 개수공사 - 미호천과 조천이 합류하는 범람원 |
관련 인물/단체 | 연기현감 허만석 |
[정의]
일제강점기 조치원 일대를 지나는 조천에 제방을 축조한 공사.
[역사적 배경]
조치원 지역을 지나는 조천(鳥川) 제방의 축조 기원은 1427년(세종 9)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연기현감 허만석(許晩石)은 연기현 북쪽 15리 지점 청주 경계에 제방을 쌓았다. 세종 때 허만석이 제방을 쌓아 생긴 부지가 현재 조치원읍 평리와 상리 지역으로 비정된다. 조선 초기에 축조된 조천 제방은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공전육조 천택 편에도 소개되어 있으며, 조선시대 후기까지 성공한 치수사업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설된 이래 급격하게 발전하는 조치원을 조선 초기에 축조된 제방으로는 보호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경과]
조치원은 미호천과 조천이 합류하는 범람원[홍수터]에 형성된 지역으로, 제방을 축조하기 전에는 매년 수해가 반복되었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고 조치원역이 개설되면서 조치원은 충청도 남북의 교통중심지로 급부상하였다. 특히 1917년 조치원이 지정면으로 출범하고 도시공간이 급격히 확장되면서 수해 예방을 위한 제방 축조는 지역의 시급한 현안으로 떠올랐다.
[결과]
1922년 10월 23일자 매일신보에 ‘조천개수 공사 결정’이라는 기사가 보도되었는데 이때부터 조천 제방 축조 공사의 실현이 가시화된 것으로 보인다. 1924년 10월 7일 조천 개수공사 기공식이 조천교 인근의 언덕에서 개최되었으며, 이후 약 2년간에 걸친 공사로 1926년 조천 제방공사가 마무리되었다. 1927년 2월 10일자 중외일보 보도에 의하면 제방공사에 소요된 예산은 36만원이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 허만석 현감이 축조한 조천 제방 덕분에 당시 1.000여 경의 농경지에 물을 댈 수 있었다. 조천 제방 공사로 허만석 현감은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고, 조선시대 후기까지 성공한 치수사업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조천 제방은 1905년 경부선이 개설된 이후 급격히 확장되는 조치원의 도시화에 따르지 못하는 빈약한 수해 방재시설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한 것이 1920년대 중반의 ‘조천 개수공사’이다. 이 사업으로 조치원은 매년 겪던 수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