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571 |
---|---|
한자 | 淸州郭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임선빈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577년(선조 10) - 곽희태 출생 |
---|---|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663년(현종 4) - 곽희태 사망 |
본관 | 청주곽씨 - 충청북도 청주시 |
입향지 | 청주곽씨 입향지 - 세종특별자치시 고운동 |
세거|집성지 | 청주곽씨 세거지 - 세종특별자치시 고운동 |
묘소|세장지 | 곽희태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고운동 |
묘소|세장지 | 곽지흠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고운동 |
묘소|세장지 | 곽창징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고운동 |
성씨 시조 | 곽상 |
입향 시조 | 곽희태 |
[정의]
곽상을 시조로 하고 곽희태를 입향조로 하는 세종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세종특별자치시의 청주곽씨는 연기군 남면 고정리[현 세종특별자치시 고운동 일대]에 곽희태가 17세기 중엽에 입향하여 세거해 오고 있으며 후손들은 연기파라고도 불린다.
[연원]
청주곽씨(淸州郭氏)의 시조(始祖)는 신라 헌강왕 때 시중을 지낸 곽상(郭祥)이다. 곽상의 후계 2대가 실전(失傳)[묘지나 고적 따위에 관련되어 전하여 오던 사실을 알 수 없게 됨]되어 증손인 곽원(郭元)[?~1029]을 1대조로 한다. 중시조 곽원은 청주(淸州)의 상당현(上黨縣) 출신으로 996년(고려 성종 15) 문과에 급제하여 서북면행영부도통, 추성문리공신상주국, 참지정사 등을 역임하였다. 곽원의 손자인 곽상(郭尙)[1034~1106]은 형부상서, 상서우복야 참지정사, 수사공 등을 역임하였다. 곽상은 두 아들로 문충공 곽탄(郭坦)과 진정공 곽여(郭輿)를 두었다. 누전하여 11세인 곽예(郭預)[1232~1286]는 문한학사와 지밀직사사를 지내고 두 아들로 곽운용(郭雲龍)과 곽운진(郭雲鎭)을 두었다. 곽원의 10세손인 곽연준(郭延俊)은 13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판개성부사, 전법판사에 이르고 충정왕 2년(1350)에 청원군(淸原君)에 봉해졌으며 만년에 청주로 낙향하여 세거하면서 본관(本貫)[시조(始助)가 난 곳]을 청주로 삼았다.
[입향 경위]
청주곽씨 연기파의 입향조는 곽희태(郭希泰)[1577~1663]이다. 곽희태의 자는 종여(宗余), 호는 선주(仙舟)이다. 1642년(인조 20) 명정전(明政殿)에서 거행된 정시 문과에 병과로 등제하였다.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는 교관(敎官)으로 있었으며 등제 후 노직(老職)[조선시대에 노인에게 특별히 내려 주던 직무가 없는 벼슬]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까지 올랐으며 문한(文翰)으로 이름이 높았다. 곽희태는 원래 한양에 거주하다가 만년에 남면 고정리 일대를 사패지(賜牌地)[고려·조선시대에 임금이 내려준 논밭]로 받아 지형이 명당인 국사봉 아래 궁골을 찾아 입향하였다고 한다.
[관련 유적]
입향조 곽희태와 아들 곽지흠, 손자 곽창징의 묘소와 묘비가 세종특별자치시 고운동 산51번지 일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