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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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將軍德泉君祠宇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태산길 93-6[태산리 10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전충곤 |
이전 시기/일시 | 1739년(영조 15) - 장군 덕천군사우 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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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1960년 - 장군 덕천군사우 중수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4년 5월 17일 - 장군 덕천군사우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1호 지정 |
문화재 해지 일시 | 2012년 7월 1일 - 장군 덕천군사우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1호 지정 해지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2년 12월 31일 - 장군 덕천군사우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제6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장군 덕천군사우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재지정 |
현 소재지 | 장군 덕천군사우 -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태산길 93-6[태산리 101] |
원소재지 | 덕천군사우 -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방축리 |
성격 | 건물 |
양식 |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2칸 |
소유자 | 전주이씨 덕천군파 종회 |
문화재 지정 번호 |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태산리에 있는 덕천군을 기리기 위해 조선 후기에 세운 사당.
[개설]
조선 정종의 열 번째 아들인 덕천군(德泉君)은 가난한 백성을 정성껏 돕고 왕자 신분임에도 들에 나가 농사를 지었다.
어느 해 여름 홍수로 금강이 범람하여 수백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자 이재민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덕을 쌓는 어른이라 하여 적덕공이라고도 불렸다.
덕천군은 정종의 10남으로, 효심이 깊고 우애로워 정종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후(厚)’ 자로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1456년(세조 2) 원종훈(原從勳)[정공신(正功臣) 이외의 작은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던 공신 칭호]에 책록(策錄)[국가나 군주 등을 위하여 공훈을 세운 사람의 이름과 공훈을 문서에 기록하거나 공훈을 찬양하여 상을 줌]되었고, 1873년(고종 10)에 증직(贈職)[종2품 벼슬아치의 부친·조부·증조부나 충신·효자 및 학행(學行)이 높은 사람을 대상으로 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을 받았다.
[위치]
장군 덕천군사우는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태산리에 있다. 처음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있던 건물이 낡아 1739년(영조 15)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변천]
고종 때 이건창이 암행어사로 내려와 사우(祠宇)[사당] 보수와 운영에 도움을 주었으며, 일제강점기에 서울과 공주에 거주하는 종인들이 합심하여 재실(齋室)[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을 건축하였다.
1960년에 대대적으로 사우를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형태]
장군 덕천군사우는 산 중턱에 3단의 층대를 쌓은 다음 서남향으로 대지를 조성하여 삼문과 담장을 시설하고 사우를 배치하였다.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뒤칸에는 제단을 설치하고 앞칸에는 참배 공간을 둔 전형적인 사당 건물이다.
[현황]
장군 덕천군사우와 관련된 유적인 덕천군 묘는 본래 남한산성의 서문 밖인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거여리[현재 서울 송파구 거여동]에 있었는데, 이 지역이 군용지로 편입되면서 1974년 덕천군사우가 있는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태산리로 이장하고 석물(石物)도 그대로 옮겨 세웠다.
또 다른 유적인 덕천군의 신도비와 묘비 등도 이때 이전하였다. 덕천군 신도비는 1808년(순조 8)에 건립된 것으로, 10세손인 이광사가 짓고 썼다. 신도비의 크기는 높이 250㎝, 폭 77㎝, 두께 45㎝이다.
장군 덕천군사우는 2012년 12월 31일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제6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