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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유림단 의거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333
한자 弟一次儒林團義擧
영어공식명칭 The First Confucianists Affairs
이칭/별칭 파리 장서 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연표보기 - 제1차 유림단 의거 발생, 독립 청원서 논의
종결 시기/일시 1919년 5월연표보기 - 제1차 유림단 의거 종결, 관련 인물 구속
발단 시기/일시 1919년 - 파리 강화 회의 개최
발단 시기/일시 1919년 3월 - 3.1 독립 만세 운동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 독립 청원서 작성 발송
발생|시작 장소 제1차 유림단 의거 - 경상북도 성주군
종결 장소 제1차 유림단 의거 - 경상북도 성주군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김창숙|곽종석|김정호|송준길|김황|장석영|김복한|이봉희|송규선|정재기|신한청년당

[정의]

1919년 김창숙 등 성주 유림의 주도로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보낸 일.

[개설]

제1차 유림단 의거는 성주 출신 김창숙(金昌淑)이 영남 유림의 큰 학자 곽종석(郭鍾錫)을 앞세워 독립 청원서[일명 파리 장서]를 작성한 뒤, 한국 유림 대표 137명의 서명을 받아 상하이[上海]로 가서 프랑스 파리 강화 회의로 발송한 사건이다. 파리 장서 운동(巴里長書運動)이라고도 한다. 김창숙을 비롯한 성주 유생들이 중심이었고, 1919년 4월 2일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장날 만세 운동 과정에서 발각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붙잡혀 성주경찰서와 대구지방법원에서 조사 및 재판을 받는 등 큰 고초를 겪었다. 여기에 성주 출신 유림 20여 명이 직접 관련되었다.

[역사적 배경]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결과 이에 따른 전쟁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프랑스에서 파리 강화 회의가 개최되었다. 파리 강화 회의를 한국 독립의 기회로 포착한 뜻있는 인사들이 제1차 유림단 의거의 계기를 만들어냈다. 3.1 만세 운동의 준비 단계에서 유림이 빠져버렸다는 상실감에서 유림 차원으로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보내는 일을 추진하게 되었다. 여기에 김창숙·김정호(金丁鎬)·송준길(宋浚吉) 등 성주 출신 유생들이 크게 활동하였다.

[경과]

제1차 유림단 의거는 1919년 2월 19일경부터 6월경까지 약 4개월 동안 전개되었다. 고종의 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로 간 유생들이 프랑스에서 개최되는 파리 강화 회의에 국제적 공의(公義)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자는 데 뜻을 모으고, 영남 유림의 큰 선비 곽종석을 앞세워 추진하였다. 이때 독립 청원서를 작성하고 서명자를 규합하고 하는 일에 김창숙 등 성주 유림이 중심이 되었다.

제1차 유림단 의거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크게 두 가지 사건이었다. 하나는 3.1 운동 「독립 선언서」의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유림 대표가 한 사람도 이름을 올리지 못한 데 대한 유림층의 상실감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김윤식(金允植) 등 친일 인사들의 명의로 된 「독립 불원서(獨立不願書)」가 일본 측에 제출되려 했던 데 대한 유림층의 반발 때문이었다. 독립 청원서는 초안이 작성된 후 여러 차례의 수정을 거쳐서 발송되었다.

독립 청원서는 김황(金榥) 또는 장석영(張錫英)이 지은 초안을 경상남도 거창 곽종석의 집에서 곽종석과 김창숙이 함께 수정하여 작성하였다. 여기에 성주 출신 유림 15명을 포함한 영남 유림 120명의 서명을 받아서 김창숙이 국외로 가져가기 위해 서울로 갔는데, 서울에서 임경호(林敬鎬)가 기호 유림 17명의 서명을 받은 김복한(金福漢)의 문서를 가지고 왔음을 알았다.

이들은 목적이 서로 같음을 알고 연서인(聯書人)을 합쳐 137명의 유림단으로 하는 문서로 다시 단일화하였다. 김창숙은 이렇게 작성된 독립 청원서를 가지고 1919년 3월 23일 용산역을 떠나 상하이로 갔다. 김창숙은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여러 인사들과 협의하여 독립 청원서를 한문본 3,000부와 영문본 2,000부로 간행한 뒤 파리 강화 회의 의장과 여러 나라 공사관 및 중국 정부 주요 관리, 그리고 국내 각 향교에까지 발송하였다.

[결과]

제1차 유림단 의거는 1919년 4월 2일 성주군 성주읍 장날 전개된 3.1 만세 운동을 계기로 성주경찰서 순사들에게 발각되었다. 그 결과 경상남도 거창의 곽종석과 충청남도 홍성의 김복한은 물론 장석영·송준길(宋浚吉)·송홍래(宋弘來)·성대식(成大湜)·이기정(李基定)·이덕후(李德厚) 등 성주 출신 인사 10여 명이 붙잡혀 성주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뒤, 대구경찰서와 대구지방법원 검사국 등으로 끌려다니며 고초를 겪었다.

제1차 유림단 의거와 관련된 사람들 중 재판을 받고 투옥된 사람은 곽종석[징역 2년], 김복한[징역 1년], 이봉희(李鳳熙)[징역 10월], 송규선(宋圭善)[징역 10월] 네 사람이었다. 그 밖의 사람들은 ‘정상 참작’ 또는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 가운데 이봉희송규선 두 사람이 성주 출신이다. 이봉희는 독립 청원서 연서인 성주 출신 15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송규선은 유림단 의거 협조자 성주 출신 10여 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의의와 평가]

제1차 유림단 의거는 유림들이 세계 열강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한 것임과 동시에 한국민의 독립 의지를 세계 만방에 펼친 것이다. 이러한 중대한 민족 운동을 심산(心山) 김창숙을 비롯한 성주 유림들이 주도하였다. 성주 출신 김창숙제1차 유림단 의거를 완전 주도하였고, 독립 청원서 연서인 137명 중 전국 군 단위 중에서도 가장 많은 15명이 성주 출신 유림이었다. 또 이를 적극적으로 도운 사람도 10여 명이나 되었다.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른 사람도 전국 4명 가운데 2명이 성주 출신이었다. 특히 정재기(鄭在蘷)[1851~1919]는 독립 청원서에 서명한 일로 성주경찰서의 호출을 받자 “짐승들의 감옥에서 죽느니 내 몸을 온전히 하여 죽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하고, 자택에서 자결 순국하였다. 이 경우는 제1차 유림단 의거 결과 유일한 사례이며, 유림으로서의 자존감을 유감없이 드러낸 경우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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