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681
한자 李元禎
영어공식명칭 I Wonjeong
이칭/별칭 사징(士徵),귀암(歸巖),문익(文翼)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정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22년연표보기 - 이원정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48년 - 이원정 진사시에 입격
활동 시기/일시 1652년 - 이원정 문과에 갑과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60년 - 이원정 청나라 사신으로 파견
활동 시기/일시 1670년 - 이원정 청나라 사신으로 파견
활동 시기/일시 1673년 - 이원정 도승지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77년 - 이원정 대사간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77년 - 이원정 형조판서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79년 - 이원정 이조판서 제수
몰년 시기/일시 1680년연표보기 - 이원정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89년 - 이원정 영의정에 추증
거주|이주지 이원정 거주지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부임|활동지 이원정 부임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부임|활동지 이원정 부임지 - 강원도 강릉시
부임|활동지 이원정 부임지 - 경기도 광주시
부임|활동지 이원정 부임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묘소|단소 이원정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신광리 396
사당|배향지 이원정 신도비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동산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광주(廣州)
대표 관직 이조판서

[정의]

조선 후기 성주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한려학파의 대표적 학자.

[개설]

남인(南人)이 서인(西人)을 상대로 정치적 대결을 벌이던 17세기 후반에 정치적으로 영남 남인을 대표하였고, 영남 안에서는 한려학파(寒旅學派)를 대표하였다.

[가계]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징(士徵), 호는 귀암(歸巖). 할아버지는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이고, 아버지는 낙촌(洛村) 이도장(李道長)이다. 어머니는 광해군과 인조 때 활약한 하담(荷潭) 김시양(金時讓)의 딸이다. 동생은 이원록(李元祿)이다. 아들은 이담명(李聃命)이다. 이원록과 이담명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활동 사항]

이원정(李元禎)[1622~1680]은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이암(耳巖)에서 살았다.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의 문인이며, 정구의 고제(高弟)[학식과 품행이 뛰어난 제자]이기도 한 할아버지 이윤우에게 배웠다. 이원정이 후일 한려학파를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이윤우의 학문적 배경이 크게 작용하였다. 1648년(인조 26) 진사시에 합격하고 1652년(효종 3)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검열(檢閱)·교리(校理)를 지내고 1660년(현종 1)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1661년(현종 2) 동래부사가 되었다. 당상관에 올랐으며, 강릉부사(江陵府使)·의주부윤(義州府尹)·충청 감사(忠淸監司)·광주부윤(廣州府尹)·양주목사(楊州牧使)에 차례로 재직하였다. 1670년(현종 11)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73년(현종 14) 도승지, 1677년(숙종 3) 대사간·형조판서를 지냈다. 1678년(숙종 4)에 영남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할 때 그 계기를 마련하였다. 1677년 상소를 통해 대동법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숙종의 허락을 받아 내었다. 1678년에 대동사목(大同事目)이 만들어지고 다음 해 시행에 들어갔다. 1679년(숙종 5)에 이조판서에 올랐다.

조선 후기에 영남에서 이조판서를 지낸 사람은 세 명에 불과하다. 이 세 명은 정경세(鄭經世)[1563~1633], 이원정, 이현일(李玄逸)[1627~1704]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이원정은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선 후기 영남 남인 중에서 4대 연속으로 문과에 합격하고, 그 가운데 3대가 실직 당상관 이상을 지낸 경우는 이원정 가문이 유일하다. 이원정 개인뿐 아니라 이윤우, 이도장, 이원정, 이담명으로 이어지는 가계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1680년(숙종 6) 이조판서로 있을 때,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서인 일파가 반대파인 남인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사건]으로 초산에 유배를 가던 도중 불려와 장살(杖殺)을 당하였다. 이것은 오랜 기간 조정의 정치적 갈등의 결과였다. 1674년(현종 15) 갑인예송(甲寅禮訟)[인선 왕후(仁宣王后) 장씨가 사망하자 시어머니 자의 대비(慈懿大妃)가 입을 상복을 두고 일어난 논쟁]부터 숙종 즉위 이후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 이전까지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런데 당시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에 대한 처벌 상소가 올라가면 서인계는 이원정이 그 배후라고 보았다. 이런 시각은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정국을 장악할 때까지 이어졌다. 결국 경신환국 이후 이원정은 서인의 주된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이원정은 1680년 윤팔월 역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곤장을 맞고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원정은 성주·칠곡권을 배경으로 하는 한려학파를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풍산·상주권의 서애학맥을 대변하는 정경세, 안동·영해권의 학봉학맥을 대변하는 이현일과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 관료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뚜렷한 학문적 업적을 쌓지는 못하였지만 각종 개혁책을 제시하는 등 강한 실무적, 실용적 성격을 보여 주었다. 『귀암집(歸巖集)』, 『경산지(京山志)』[편저], 『연행록(燕行錄)』·『연행후록(燕行後錄)』 등의 저술이 있다.

[묘소]

묘는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신광리 396번지 옆 개상 마을 뒤에 있다.

[상훈과 추모]

사후 9년이 지난 1689년(숙종 15) 신원되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신도비가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동산재에 있으며, 번암 채제공(蔡濟恭)이 비문을 지었다. 시호(諡號)는 문익(文翼)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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