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817
한자 李慶煥
영어공식명칭 I Gyeonghwan
이칭/별칭 문익(文益),포제(浦齋),이희구(李熙龜),이점보(李點甫)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2년 6월 8일연표보기 - 이경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3년 6월 - 이경환 일본으로 건너감
활동 시기/일시 1928년 11월 25일 - 이경환 직소장을 일왕에게 전달하려다 붙잡힘
활동 시기/일시 1928년 12월 12일 - 이경환 교토지방재판소에서 징역 6월 선고받음
몰년 시기/일시 1929년 11월 25일연표보기 - 이경환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8년연표보기 - 이경환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1년연표보기 - 이경환 건국 훈장 애국장 추서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3년 - 이경환과 부인 성산 배씨 추모 성주 옥성리 의열각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
출생지 이경환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용흥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이경환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용흥리
활동지 이경환 활동지 - 일본 교토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1923년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인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고, 1928년 11월 25일 일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직소(直訴)를 시도했다가 체포되었다. 이어 징역 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고 귀국하여 1929년 자결하였다.

[가계]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문익(文益), 호는 포제(浦齋). 다른 이름으로 이희구(李熙龜) 혹은 이점보(李點甫)를 사용하였다. 세종 때 문신 이견기(李堅基)의 후예이며, 부인은 성산 배씨(星山裵氏)이다.

[활동 사항]

이경환(李慶煥)[1902~1929]은 1902년 6월 8일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용흥리에서 태어났다. 1923년 6월 일본으로 건너가 거주하면서 조선인이 차별 대우를 받는 현실에 항상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신문과 잡지를 통해서 만주 거주 조선인이 계속 중국으로 귀화하고 조선인의 도일을 일제가 엄중히 제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비분강개하였다.

1927년 신문에서 수평사(水平社) 사원의 직소 사건 기사를 읽고 관련 범죄에 대한 형벌이 비교적 가볍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조선인 차별 대우 관련 직소를 결심하였다. 수평사는 1922년 일본의 특수 부락민 에다[穢多, 屠者]가 조직한 신분 해방 단체였다. 누구의 도움이나 공모 없이 단독으로 직소하기로 작정하고 기회를 보다가, 일왕의 도산릉 행차 예정일 이틀 전인 1928년 11월 23일 오전에 원고지에 직소장(直訴狀)을 썼다.

이경환은 직소장을 통해서, 민족적 차별은 동양 평화의 정신에 장해(障害)라는 전제하에 “一. 조선총독부를 폐지할 것. 一. 일본인과 같이 중의원의 의원 선거를 할 것. 一. 일본인과 같은 형식으로 징병할 것. 一. 재외 조선인을 일본인과 같이 보호할 것. 一. 기타 정치적 차별을 폐지할 것” 등의 사항을 주장하였다.

1928년 11월 25일 일왕이 도산릉에서 참배를 마치고 도쿄역에 내려 교토[京都]의 왕궁으로 가던 오전 11시 20분경, 군중들 틈에서 직소장을 옷 속에 숨기고 있던 이경환이 “직소(直訴)”라고 외치면서 뛰어나갔다. 그러나 직소장은 전달하지 못한 채 일왕을 경위하던 호리가와[堀川] 서원(署員)에게 체포되어 청원령 위반 혐의로 교토지방재판소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이어 징역 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고 귀국한 후인 1929년 11월 25일에 “빼앗긴 나라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하며 목을 매어 자결했고, 3일 뒤에는 부인도 뒤따라 자결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8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옥성리 산72-3에 순국한 이경환과 남편을 따라 자결한 부인 성산 배씨를 기리기 위해 건립한 의열각(義烈閣)이 있다. 성주 옥성리 의열각은 2003년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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