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욕행록」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1316
한자 蓬山浴行錄
영어공식명칭 Bongsanyokaengnok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은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543년 - 정구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620년 - 정구 사망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617년연표보기 - 「봉산욕행록」 저술
성격 기행문
작가 정구

[정의]

1617년 성주 출신 문신인 정구가 신병 치료를 위해 동래 온천욕을 다녀오는 과정을 기록한 일기체 형식의 산문.

[개설]

원래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1569~1634]의 『석담집(石潭集)』에 실려 있었는데, 노상직(盧相稷)[1855~1931]의 집에서 이본이 발견되자,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의 13세손인 정재기(鄭在夔)[1857~1919]가 “두 본을 참고하여 간략한 것은 상세하게 하고, 같은 것은 그대로 취하며, 서로 다른 것도 함께 남긴다.”라는 편집 방침에 따라 정본(定本)을 만들어 회연서원에서 1912년에 활판으로 인쇄하여 간행하였다. 이것이 「한강선생봉산욕행록(寒岡先生蓬山浴行錄)」이다.

[구성]

정구가 75세가 된 해인 1617년(광해군 9) 7월 20일부터 같은 해 9월 5일까지 46일간의 기록이다. 1615년(광해군 7) 정구는 73세에 중풍이 들면서 건강이 급속하게 나빠졌다. 이에 치병의 방도를 강구한 것이 바로 동래 온천행이었다. 당시 동래 온천행의 노정은 봉산(蓬山)[동래]으로 욕행을 떠나는 하행길, 동래 온천에서의 목욕, 봉산에서 사수(泗水)로 돌아오는 상행길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내용]

「봉산욕행록(蓬山浴行錄)」에 기록된 정구의 봉산 노정은 대체로 셋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 노정은 1617년 7월 20일~26일 사수에서 봉산으로 욕행을 떠나는 하행길이다. 두 번째 노정은 7월 26일~8월 25일 동래 온천에서의 목욕이다. 세 번째 노정은 8월 26일~9월 4일 봉산에서 사수로 돌아오는 상행길이다. 정구를 비롯한 일행이 사수를 떠나 다시 사수로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45일이나, 9월 3일에 사수에 돌아와 하룻밤을 더 머물고 그 다음날인 9월 4일에 정구와 헤어지기 때문에 도합 46일간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첫 번째 노정은 대구 사빈에서 출발하여 현풍, 고령, 창녕, 의령, 칠원, 함안, 영산, 창원, 밀양, 양산, 김해를 거쳐 동해로 가는 노정이며, 7월 26일 부산에서의 노정을 제외하면 모두 수로를 이용하였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맞이하거나 배웅하였다. 또한 도동서원, 신산서원 등 낙동강 연안에 있는 서원에 들러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1454~1504],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을 추모하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두 번째 노정은 동래 온천에서의 목욕에 관한 일정이며, 정구의 치병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이 기간이 가장 길다. 당시 동래부사인 황여일(黃汝一)[1556~1622]은 스승인 정구의 치병을 위해 온천을 새롭게 정비하고 숙소를 증축해 두었으며, 정구가 사용할 나무 욕조까지 만들어 두었다. 이 치병 과정에서도 정구는 수많은 지역의 관리들과 선비들의 영접을 받았으며, 아울러 『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와 『예의답문(禮疑答問)』을 강론하는 등 학자로서의 본분과 자신의 책무 또한 잊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노정은 동래 온천에서 출발하여 양산, 경주, 하양, 경산을 거쳐 사수로 다시 돌아오는 노정이며, 모두 육로를 이용하였다. 상행길에서는 세 차례나 동화록을 남기며 자리를 함께한 사람들과 기념이 될 수 있도록 하였다.

[특징]

정구가 동래로 욕행을 떠난 것은 치병이 일차적인 목적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학술 문화 공간을 경유하며 지역 인사들의 직간접적인 내방과 문안을 받았으며, 당시 정구가 만난 사람은 300명을 상회한다. 이는 장기적인 일정, 치밀한 계획, 방대한 규모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여느 욕행과는 큰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이 노정의 기록을 통해 당대 선비들의 여행과 접대, 기념과 추모, 강학 등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한편, 한강학파의 학문적 결속 및 운영 등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17세기 사대부 문인의 치병을 위한 여행 일기라는 의의를 지닌다. 특히 기록 의식이 강조되어 정박한 곳을 비롯하여 노정 중에 스쳐 지나가는 지명이나 정자, 내왕한 사람들을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하루 동안 이동한 거리, 욕탕의 형태와 목욕 횟수, 목욕을 도운 사람들, 모시고 잔 사람, 복용 약제, 시침 등도 빠뜨리지 않았다. 또한 당시 문화적 요소들과 그에 따른 선비들의 의식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낙동강 연안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한강학파의 활동이 정구의 욕행과 맞물리면서 그들이 지녔던 존현의식과 동류의식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인 것이다. 따라서 「봉산욕행록」정구한강학파, 나아가 당대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활용 가치가 매우 높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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