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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거성리에 있는 조선 시대 사창 터. 거성리 사창(巨城里社倉)은 조선 시대 해미현(海美縣)에 설치되어 세곡을 보관하던 창고였다. 서산시 운산면 거성리는 조선 시대에 서산과 해미의 접경지로 대교천의 동편에 있다. 지금은 내륙 지역이지만, 전언에 의하면 1900년 이전까지 마을 앞의 음지말들과 홍안들 일대가 모두 바다였고, 배가 들어와 정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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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노비. 걸포(乬布)는 귀천(貴千)과 형제로 노비였다. 둘은 무척 우애가 깊어 먹을 것이 있으면 꼭 나누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갔다. 어느 해 형의 목화밭에 목화가 피지 않자 동생은 자기 밭에서 좋은 목화송이를 따서 나누어 주었다. 형제의 이런 돈독한 우애는 주변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 걸포와 귀천의 이야기는 서산의 사찬 읍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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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알지를 시조로 하고 김연(金堧)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서산시 세거 성씨. 경주 김씨는 조선 시대 서산 지역의 유력한 세거 사족으로 1500년대 중반에 입향 한 이후 서산 지역에서의 향촌 활동에 활발히 참여하였고, 단구자김적이나 학주김홍욱 등 다수의 인물이 중앙 관료로 진출하였다. 특히 이곳 출신인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1745~1805]가 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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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崔致遠)을 시조로 하고 최사(崔泗)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서산시 세거 성씨. 경주 최씨는 고운(孤雲) 최치원[857~?]을 시조로, 최사를 입향조로 하는 서산시 지곡면 일대의 세거 성씨이다. 서산의 경주 최씨는 고려~조선 전기까지의 기록은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경주 최씨의 서산 입향조는 최사인데 바로 최몽량(崔夢亮)[1579~1627]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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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광(金興光)을 시조로 하고 김연(金璉)을 중시조로 하는 충청남도 서산시 세거 성씨.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신라 신무왕(神武王)의 셋째 아들인 김흥광을 시조로 한다. 김흥광은 고려가 삼한을 통일하며 신라가 멸망하자 경주를 떠나 무진주(武珍州) 서일동(西一洞)[현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에 은거하였다. 그 후 고려 태조가 김흥광을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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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담양. 자는 우경(虞卿), 호는 경재(敬齋). 1729년 정리된 담양 국씨 족보에는 성유(聖喩)로 적혀 있고, 1974년 족보에는 현남(賢男)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후에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는 참봉을 지낸 국여명(鞠汝明)으로, 호는 정숙(靖肅)이다. 어머니는 문화 유씨로 유창수(柳昌壽)의 딸이다. 첫 번째 부인은 서령 유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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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鄭盛)을 시조로 하고 정충신(鄭忠信)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서산시 세거 성씨. 금성 정씨(錦城鄭氏)는 지곡면 대요리에서 가장 오래 거주한 성씨로 ‘한우물 정씨’라고 불린다. 임진왜란과 이괄(李适)[1587~1624]의 난, 정묘호란 등의 전란에서 큰 공을 세운 정충신[1576~1636]이 사패지를 받은 후 350년 이상 세거하고 있다. 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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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관룡(金寬龍)[1900~1975]은 1919년 당시 해미면에 있던 해미공립보통학교의 졸업반 학생으로 평소에 일제 식민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1919년 3월 24일 해미공립보통학교 졸업식 직전에 면사무소 서기인 이계성(李啓聖)으로부터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를 받았다. 김관룡은 졸업생을 위한 고별회에 참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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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서산 출신의 의병. 김병수(金炳洙)는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원평리 출신으로 안흥첨사(安興僉使)를 지내다 고향인 서산으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1905년 11월 일본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에 거주하는 이남규(李南珪)를 찾아갔다. 이남규는 일찍이 유학(儒學)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로 갑오경장의 부당성과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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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경주. 자는 명옥(明玉), 호는 한월당(寒月堂). 아버지는 김덕재(金德載)이고 어머니는 연안 이씨(延安李氏)로 이승원(李昇遠)의 딸이다. 아들은 김홍제이다. 김상정(金商玎)[1875~1954]은 1918년 고종 황제의 승하 소식을 듣고 손가락을 끊어 ‘대명의리(大明義理)’라는 혈서를 써서 깃발을 만들어 달았다.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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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서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광산. 호는 석경(石耕). 광산 김씨 서산 입향조인 김위재(金偉材)의 후손이다. 김용철(金容哲)은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취평리에서 태어났다. 성품이 온후하고 성실하여 다른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홀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여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하고, 공무로 문안을 거를 때는 뜰에 서서 바지를 걷고 종아리 맞기를 기다렸다고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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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유생. 본관은 경주. 아버지는 안주목사를 지낸 김연(金堧)이다. 아들은 안기도 찰방(安奇道 察訪)을 지낸 김적(金積)이다. 손자는 김홍욱(金弘郁)이다. 1500년대 중반 김연이 정계 은퇴 후 서산에 자리를 잡아 경주 김씨 입향조가 되었다. 이후 후손들이 대대로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에 모여 살았다. 마을에 큰 다리가 있어 유계리의 경주 김씨를 ‘한다리 김씨[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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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열(洪殷悅)을 시조로 하고 임진왜란 후 입향한 충청남도 서산시 세거 성씨. 서산 지역 남양 홍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여지도서(輿地圖書)』 서산군 인물조에 홍운해(洪雲海) 아들 홍성원(洪性源), 홍지원(洪智源)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 형제는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의 문하에서 공부하다 광해군 대에 사마 급제한 이들로 사마방목에는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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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 성연면 명천리 창말에 있는 조선 시대 사창 터. 명천리 사창(鳴川里社倉)은 조선 시대 서산군에 설치되어 세곡을 보관하던 창고였다. 명천리 사창 터에 관해서는 일제 강점기인 1927년에 편찬된 『서산군지』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당시 명천리 사창은 조선 시대 서산군의 해창(海倉)으로 ‘명천창(鳴川倉)’이라 불렸는데, 창고의 규모는 기와와 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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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차달(柳車達)을 시조로 하고 유계손(柳繼孫)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서산시 세거 성씨. 문화 유씨의 본향인 문화는 지금의 황해도 신천군 문화면 일대에 있던 옛 지명으로, 남북국 시대에는 유주(儒州)라 불렸던 곳이다. 시조 유차달의 8세손 유경(柳璥)이 최씨 무신 정권을 무너뜨리고 왕정을 회복시킨 공으로 위사일등공신(衛社一等功臣)에 봉해지고, 그의 고향인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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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성대군(密城大君) 박언침(朴彦忱)을 시조로 하고, 밀양을 본관으로 하는 충청남도 서산시의 세거 성씨.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조선 전기의 각종 기록 중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그리고 『호산록(湖山錄)』의 서산 성씨조에 ‘서산의 속성’, ‘지곡의 촌성’으로 등재되어 있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여지도서(輿地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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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 고북면 봉생리에 있는 조선 시대 사창 터. 봉생리 사창 터는 조선 시대 홍주목에서 세곡을 보관하던 창고 중 하나인 서창(西倉)이 있던 곳이다. 봉생리 사창(鳳生里社倉)이 있던 자리는 지금은 내륙이지만 개간하기 전까지 바다에 접한 곳이었고, 그 위치로 보아 서해안 수로 교통에 바로 연결되는 요충지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 관제 개정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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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서산군수 이민영이 간행한 충청남도 서산군의 사찬 읍지. 서산군수였던 이민영(李敏寧)[1877~?]은 서산에 있는 각종 군지들의 저작의 고증이 어렵고, 흥폐연혁(興廢沿革)을 참고할 만한 문헌이 없음을 아쉬워하였다. 이에 구지(舊誌)를 중심으로 기록을 모으고 자료들을 덧붙여 1925년 4월부터 『서산군지』를 기고(起稿)하기 시작하였고, 1927년 12월 20일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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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순흥. 고려 후기 유학자인 안향(安珦)의 14세손이다. 서산의 순흥 안씨는 병조판서 안국인(安國仁)이 입향한 이후 수백 년 간 서산시 팔봉면 덕송리와 양길리 일대에 모여 살았다. 순흥 안씨는 서산의 토성으로 여러 기록에 나오는데, 조선 초기부터 터를 잡고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안만흥(安萬興)은 서산시 팔봉면 덕송리에서 태어났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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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시대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 있었던 역로의 교통·통신 및 숙박 시설. 역원은 전통 시대 역로(驛路)에 설치되었던 국영 숙식 시설이다. 관리가 파견되어 역마와 역로를 관할하고, 길을 지나는 관원에게 말과 숙식을 제공하였으며, 공문서의 신속한 전달과 관수 물자를 운반하는 육상 교통의 핵심 기관이다. ‘역(驛)’은 대로변에 12㎞마다 설치한 교통 통신 조직이라면, ‘원(院)’은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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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 성연면 왕정리 왕정마을에 있는 샘. 옥동샘을 일컬어 성인 ‘성(聖)’자와 못 ‘연(淵)’자를 썼는데, 이 연못 이름을 따서 지역의 지명을 성연이라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충청남도 서산시 성연면 왕정리에는 예로부터 영험성이 있다고 하는 옥동샘이 있다. 옛날 이 샘은 검푸르게 맑은 물이 솟았다고 한다. 그 시절 이 샘가에 칠순 노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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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홍양일기(洪陽日記)』의 저자. 본관은 파평. 아버지는 윤선필(尹善必)이다. 윤시영(尹始永)[1855~?]은 1891년(고종 28) 문과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가주서, 홍문관교리, 홍문관부수찬, 중학교수, 양호선무사종사관, 부안현감, 홍문관시독, 비서원승을 지냈다. 1902년(고종 39) 함흥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안핵사(按覈使)로 파견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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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서산 지역을 목으로 승격시켜 달라고 상소를 올린 인물. 본관은 알려지지 않았고, 아버지는 이산(李山)이다. 이상(李相)은 고려 시대 이후 서산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온 토착 세력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성씨 조에는 지곡과 인정에 토착 성씨인 이씨가 살고 있다고 적혀 있다. 지방의 행정 체제 개편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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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전주 이씨 사족. 본관은 전주. 전주 이씨 덕천군파 후손으로, 아버지는 이유인(李惟仁)이다. 어머니는 경주 최씨이고 아들은 이호익과 이우익을 두었다. 장남 이호익은 사마시 생원에 급제하였고, 차남 이우익은 선조때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에 올랐다. 이순(李淳)은 향촌에 살면서 사족을 단속하고 향촌의 질서 유지에 힘썼다. 『호산록(湖山錄)』에는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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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무신. 본관은 전주. 정종의 6세손으로 전주 이씨 덕천군파 종실의 후손이다. 부인은 경주 최씨이다. 아들은 이순(李淳)이고, 손자는 사마시 생원 이호익과 문과 급제 후 병조정랑에 오른 이우익이다. 이유인(李惟仁)은 서산의 음암면 신장리와 도당리에 모여 살았던 전주 이씨 덕천군파 종실의 후손이다. 문관으로 적순부위(迪順副尉)를 지냈다. 그는 향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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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무신. 본관은 전주. 자는 중온(仲溫). 전주 이씨 변성군(邊城君) 이계연(李繼連)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비인현감(庇仁縣監)을 지낸 이학수(李鶴壽)다. 형은 임진왜란 당시 패전의 책임을 지고 억울하게 효수당한 김해 수문장 이유검(李惟儉)이다. 이유직(李惟直)[1552~?]은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전관으로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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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연안. 자는 윤숙(允淑), 호는 부재(復齋) 또는 정우(靜寓). 문충공 월사 이정구(李廷龜)의 12세손으로, 아버지는 이인승(李仁承)이고 어머니는 광산 김씨이다. 이철영(李喆榮)[1884~1945]은 1910년 8월 서산 읍내에 있는 경찰서 게시판에 한일합방에 대한 방문이 붙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포고문을 찢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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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무신. 본관은 전주. 자는 운몽(雲夢). 정종의 넷째 아들인 선성군(宣城君)의 8세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판에 증직된 이정방(李定邦)이며, 아버지는 참판 이진백(李震白), 어머니는 청송 심씨이다. 동생은 이연(李沇)이다.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는 전주 이씨들의 동족 마을로, 이곳에 세거하는 전주 이씨를 속칭 ‘예미 이씨’라고도 부른다. 전주 이씨가 서산시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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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출신으로 조선 제21대 왕인 영조(英祖)의 계비. 본관은 경주. 경주 김씨 김한구(金漢耉)[1723~1769]와 원주 원씨의 장녀이다. 김한구는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고, 황해도관찰사를 지내다 강옥 사건(姜獄事件)으로 장살당한 김홍욱(金弘郁)의 현손이다. 김한구 가문은 경주 김씨의 양대 명문으로, 추사 김정희(金正喜)를 비롯하여 8명의 정승과 정순왕후를 배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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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창리 창촌마을에 있는 조선 시대 창고 터. 창리(倉里) 창촌(倉村)은 조선 시대 세곡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던 지역이며,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조운을 통해 운반되는 세곡의 저장 공간이었고, 또한 배를 만드는 창고인 선박소의 기능도 하였다. 창촌 창터는 1800년대에 편찬된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 화변면 왜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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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시대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서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한 신하. 충신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떨쳐 일어나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목숨을 바친 인물을 일컫는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 활동을 한 서산 출신의 충신으로는 김호열(金好說)[1534~?], 이유검(李惟儉)[1538~1592], 강효윤(姜孝胤), 유지립(柳之立)[1555~?], 문성해(文成海)[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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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춘(趙椿)을 시조로 하고 조아(趙雅)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서산시 세거 성씨. 평양 조씨의 시조는 조춘으로 고려 시대 금자광록대부 추밀원부사(金紫光祿大夫樞密院副使)를 지냈다. 당시 남송(南宋)에 들어가 금(金)나라를 정벌한 공로로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고 한다. 조춘의 선조는 중국에서 귀화하였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역사적 사실은 확인하기 어렵다.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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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한기동(韓基東)[1898~1997]은 본관은 청주, 평양 출신이다.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경기도 장단군 진남면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고, 같은 해 3월 26일 백태산(白泰山)·이성구(李成九)·이창영(李昶永) 등 100여 명의 인사와 함께 성화학교(聖化學校)를 출발하여 인근 지역을 돌면서 독립 만세 운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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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충청남도 서산의 정해현과 여미현을 합친 현. 해미현(海美縣)은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을 합한 서산 지역의 옛 지명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정해현은 고려 태조 때 몽웅현(夢熊縣)의 아전 한씨(韓氏)가 큰 공이 있어 대광(大匡)의 작호를 내리고, 홍주(洪州)의 속현이었던 고구현(高丘縣)[현재의 서산시 해미면(海美面)·고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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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충청남도 서산의 별호(別號). 서산이 호산(湖山)으로 불리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기원이 무엇인지는 확실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서산의 또 다른 이름은 기군(基郡)·부성(富城)·서령(瑞寧)·서주(瑞州)이며, 조선 후기의 지리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호산에 대한 고증은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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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충청도 서산을 비롯한 각 군현에서 작성한 읍지와 사례들을 합편한 충청도의 도지. 1871년(고종 8) 전국적인 읍지 편찬 계획이 수립되어, 충청도의 각 군현에서 모인 읍지들을 17책으로 만들었다. 현재 규장각에 소장된 『호서읍지(湖西邑誌)』는 총 17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크기는 가로 20㎝, 세로 30.4㎝이다. 『호서읍지(湖西邑誌)』 각 책별 54개의 읍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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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향임(鄕任). 본관은 밀양. 아버지는 판중추부사를 지낸 황진(黃璡)이다. 외삼촌은 중종 때의 명신 진우(陳宇)[?~1535]와 진식(陳寔)[1519~1568]이다. 황유성(黃有誠)은 오랫동안 수령을 보좌하는 자문 기관인 유향소(留鄕所)의 향임으로 활동하였다. 풍속을 바로잡고 향리를 감찰하며, 민의를 대변하는 향임의 역할에 충실하여 백성들에게 불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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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서 효성으로 어버이를 잘 섬긴 자녀. 효자는 부모를 효성으로 극진하게 섬기는 자식을 일컫는다. 효(孝)는 부모가 살아 있을 때 정성껏 모시는 것뿐만 아니라 사망한 뒤에도 극진히 제사를 모시는 것 등을 포함한다. 조선 사회에서는 가정에서의 효도를 국왕의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지배 이념으로 보아서 적극 장려했다. 반대로 불효하거나 역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