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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458
한자 靑年運動
영어의미역 Seosan Young Man's Associati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지수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0년연표보기 - 서산청년회 조직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4년 4월 - 서령청년회 조직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8년 1월연표보기 - 서산노동청년회 조직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서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사회 운동.

[배경]

일제 강점기 때 서산은 교통이 불편하여 신문화 유입이 더딘 지역이었다. 그러나 3·1 운동 이후 보통학교 교육이 보급되고, 동경이나 경성 등지의 외지 유학생들까지 대거 귀향하면서 청년 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서산 지역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농촌 개량이나 농민 계몽을 목표로 한 실력 양성 운동 계열의 청년 운동이 대세를 이루었으나, 1920년대 중반에 청년회 혁신 운동이 전개되면서 좌익 청년들이 운동의 주도권을 잡아가기 시작하였다. 서령청년회가 해체되고 서산군 청년동맹이 결성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20년대 전반의 청년 운동]

서산 지역에서 최초로 조직된 청년회는 1920년 읍내 청년들이 조직한 서산청년회였다. 1922년 7월 당시 서산청년회 회장은 임학수였으며, 이들은 중앙의 조선청년연합회 강연단을 초청하여 강연회를 열기도 하였다. 서산청년회가 유야무야된 이후 서산 지역의 청년 운동은 1924년 4월 조직된 서령청년회가 주도하였다. 서령청년회는 서산 읍내 유지들의 협조를 받아 노동 야학을 운영하였다.

[1920년대 후반의 청년 운동]

1920년대 중반까지 서산 지역의 청년 운동은 이른바 ‘유지[신사] 청년’들이 주도하였다. 그러나 1927년 10월에 열린 서령청년회 혁신 총회를 계기로 점차 진보적인 성향의 청년들이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회장제가 위원장제로 바뀌고 조직의 명칭이 서령청년회에서 서산군 청년동맹으로 바뀐 것 등은 이를 보여 주는 증거들이다. 1924년에 창립된 조선청년총동맹은 창립 대회에서 ‘대중 본위의 신사회 건설을 기도함’, ‘조선 민중 해방 운동의 선구가 되기를 기약함’ 등의 강령을 채택하였다.

서령청년회 혁신 총회에서 새로 선출된 임원은 집행위원장 전영석(田泳奭), 위원 김형식(金灐植), 유성식(柳盛植), 김천인(金天仁), 최용안(崔容安), 김창돈(金昌敦), 유기남(柳基南) 등이었다. 이들은 이전의 임원들과는 달리 상당히 진보적인 성향이 강한 인물들이었다. 혁신 총회에서 논의된 안건은 서령청년회 혁신에 관한 건, 독서 기관 설립 건 등이었다.

1928년 9월 조선청년총동맹 서산지부[중심인물 조석구]는 관북 지역 수해 구제의 건, 지부 설치의 건 등을 논의하였는데, 이는 서산 지역의 사회 운동이 전국 규모의 운동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하지만 관북 지방의 수해 동포를 구원하기 위한 동정금 모금 활동은 경찰의 탄압으로 무산되었다. 1929년 조선청년총동맹 간부인 이순택(李淳澤), 이일순(李一淳)과 동아일보 당진 지국 최병국(崔秉國) 기자 등이 국민협회(國民協會)[1920년 1월 경무국장 마루야마의 지원과 지도로 조직된 친일 단체] 일행과 언쟁하다가 경찰에 검거되어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조선청년총동맹 서산지부는 1927년 12월 서산소비조합, 서산봉재조합, 서산재봉회사 분점 등 각 사회단체 대표[김영찬, 조석구, 전영석]들과 함께 재만주 동포 옹호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기로 의견을 모은 뒤 서산구락부에서 재만동포옹호동맹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1920년대 후반 서산 지역의 청년 운동을 이끈 조직은 조선청년총동맹 서산지부와 1928년 1월에 창립된 서산노동청년회였다. 1928년 1월 13일 천도교 교리원에서 창립된 서산노동청년회는 창립총회에서, ‘노동소년회 설치 운영의 건’, ‘소작인 이중 부담 및 소작권 이동의 건’을 결의하였는데, 이때 결의된 사항들은 당시 사회주의 색채를 띠고 있었던 전조선노동당의 결의와 유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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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월 서산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청년 단체는 소원청년회, 태안조기회, 몽호청년회, 갈톱청년회, 미호청년회, 서산군청년동맹, 조선청년총동맹 서산지부 들이었다. 하지만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서산 지역의 청년 운동은 경찰의 탄압 등으로 인해 급속히 쇠퇴하였다. 그래서 1930년대 서산 지역에서 눈에 띄는 사회 운동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료로 확인되는 사건으로는 명향회 사건이 유일하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해방 이후의 청년 운동]

1945년 12월 서울에서 개최된 전국농민조합총동맹 결성 대회에 서산 대표로 이흥식(李興植)과 조동환이 참석하였는데, 이흥식은 일제 시기 서산군 청년동맹 위원장을 역임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1945년 11월에 개최된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 대회에 서산 지역 대표로 참석한 양근영[운산]·전상갑[서산]·이병희[태안] 등도 일제 시기 청년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이었다. 회고에 따르면 양근영·전상갑 등은 6·25 전쟁 때 처형되었고, 이병희는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었다고 한다. 1946년 서산군 인민위원회 위원장은 이종만(李鍾萬)[당시 60세, 천도교인]이었으며, 서산군 청년동맹 위원장은 김동운(金東雲)[당시 35세, 한약상], 부위원장은 김대원(金大遠)[당시 32세, 과자상]이었다.

[의의와 평가]

일제 시기 지역 사회 운동의 주역은 각 지방의 혁신 청년들이 주도한 청년 단체들이었다. 서산 지역도 서산청년회와 서산군 청년동맹을 중심으로 활발한 청년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이런 활동은 해방 이후 자주적 통일 민족 국가 수립 운동의 주요한 정치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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