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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500422
한자 朝鮮時代
영어의미역 Joseon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울릉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호동

[정의]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울릉도 역사.

[개설]

울릉도는 고려 말 왜구 때문에 무인도가 되었으나, 조선 초 이래 육지의 백성들이 계속 건너가 살았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도 울진현(蔚珍縣)에 소속되었지만, 이곳이 왜구의 거점이 된다고 하여 조선 전기에는 쇄환정책(刷還政策), 조선 후기에는 수토정책(搜討政策)을 시행하였다. 그리하여 본토로부터 울릉도에 들어간 사람들을 ‘피역(避役)의 무리’로 보고 본토로 이주시켰으나 몰래 들어가 사는 백성들이 많았다.

[변천]

1412년(태종 12) 강원도관찰사의 보고에 의하면 울릉도에는 11호 60여 명이 거주하였고 소와 말, 논은 없지만 콩과 보리를 경작하고 해산물과 과일이 많았다고 한다. 태종세종 연간에는 울릉도에 군현을 설치하고 수령을 두려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너무 멀리 떨어진 바다 가운데에 위치해서 바닷길이 험난하고 왜구의 침입이 염려된다고 하여 끝내 읍이 설치되지 못하고 쇄환정책이 실시되었다.

쇄환정책의 실시로 울릉도에는 안무사(安撫使) 또는 순심경차관(巡審敬差官)을 파견하여 섬을 조사하고 본토로부터 몰래 들어간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또한 쇄환정책을 통해 일본에게 울릉도가 조선의 땅임을 인식시키고자 하였다. 1471년(성종 2) 삼봉도(三峰島)[독도]를 조사하기 위해 박종원(朴宗元)이 파견되었다. 1614년(광해군 6) 일본이 울릉도를 의죽도(礒竹島)라 하여 그들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다음 해에 울릉도를 조사하려고 하였다. 조정에서는 강력히 이의를 제기하였고 양국 간에는 분규가 일어났다.

그 후 1693년(숙종 19)과 1694년에는 일본이 울릉도를 죽도(竹島)라고 하면서 그들의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696년 안용복(安龍福) 등이 활약하여 울릉도에 대한 일본과의 영유권 분쟁을 종결지었다. 이후 울릉도의 주요 사건을 연대기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693년(숙종 19) 울릉도에서 안용복 일행과 일본 어부들의 충돌로 조선과 일본 사이에 외교 분쟁이 발생함. 안용복이 1차로 도일(渡日)함.

1694년(숙종 20) 삼척첨사 장한상(張漢相)이 울릉도를 수토함.

1696년(숙종 22) 안용복이 2차로 도일하여 일본 호키주[伯耆州] 태수와 담판을 통해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식시킴. 일본인의 출어·벌채금지서계를 조선에 전달함.

1882년(고종 19) 검찰사(檢察使) 이규원(李奎遠)이 울릉도 검찰함. 울릉도 개척령이 반포됨. 전석규(全錫奎)를 울릉도도장(島長)에 임명함. 수토정책을 철폐함.

1883년(고종 20) 울릉도 주민 16호 54명을 이주하기 시작함.

1895년(고종 32) 삼척영장 겸임 도장제(島長制)에서 전임 도장을 임명하고 도장을 도감(島監)으로 개칭함.

1900년 울릉도를 울도군(鬱島郡)으로 개칭하면서 강원도에 편입하고 행정 구역을 남면과 북면으로 나눔. 도감을 군수(郡守)로 개정함.

1906년 울도군을 경상남도에 편입함.

1914년 울도군을 경상남도에서 경상북도로 이속함.

[쇄환정책과 수토정책]

조선시대에는 울릉도와 독도강원도 울진현의 속도로서, 강원감사의 지휘와 통제권에 있었다. 그러나 쇄환정책 또는 수토정책의 틀 속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의 군현 단위는 결코 아니었다. 호적에 등재된 군현민도 없고 토공도 없으므로 이를 관장할 주수(主帥)도 없었다.

그러나 울릉도와 독도에는 쇄환정책과 수토정책에도 불구하고 거주민이 항상 존재하였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피역인(避役人)으로서 범법자들이기 때문에 쇄환과 수토의 대상이다. 이들을 현지에 부적하고 주수를 파견하여 하나의 군현 단위로 획정하는 것은 강원도감사의 소관이 아니고 중앙 정부의 소관이었다. 따라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정책 결정권은 중앙 정부의 소관 업무에 속하였다.

울릉도의 파악, 쇄환정책, 수토정책의 실시 여부 및 울릉거민의 쇄환을 위해서 별도의 관리가 파견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안무사와 순심경차관이 파견되었다. 수토정책이 확립된 숙종조 이후 울릉도에 대한 수토는 2년 또는 3년마다 월송만호와 삼척영장이 교대로 한번씩 하였다.

울릉도를 속도로 거느리고 있는 울진현령을 파견하지 않고 삼척첨사와 월송만호를 파견한 것은 울릉도 수토에 수군의 동원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있는 삼척과 함께 울릉도에 파견된 월송만호는 평해군의 동쪽 7리에 있는 월송포영(越松浦營)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수군만호(水軍萬戶) 1명이 있었다.

[유물과 유적]

1. 대풍헌(待風軒)

현재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구산리 중심에 위치한 기와집 동사의 대청 문 앞에는 ‘대풍헌(待風軒)’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대풍헌에는 ‘완문(完文)’과 ‘수토절목(搜討節目)’의 내용이 담긴 고문서가 보관되어 있다. 전자는 1811년이나 1871년, 후자는 1823년이나 1883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자는 삼척첨사와 월송만호가 3년에 한번씩 울릉도를 수토할 때 구산포에서 출발하여 그곳으로 돌아오는 행차와 관련된 내용이다. 그들은 순풍을 기다리기 위해 대풍헌에서 머물곤 하였다. 이때 유숙하는 기간이 길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접대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관아에서는 그 경비를 9개 연해 촌락에 풀어 거기서 생긴 이식으로 충당하였다. 그 과정에서 촌락의 동세가 각기 달라서 민원이 자주 일어나므로 관아에서 그 해결 방안을 논의하여 결정한 내용을 이 문서로 남겼다.

후자는 전자에서 정한 각 동의 비용이 많아서 지탱하기 어렵다고 하여 각 동 대표들이 모여 의논한 결과를 적은 것이다. 그 내용은 상선뿐만 아니라 어선과 미역[藿物]을 실은 배가 선적물을 내릴 때, 전국의 해안에서 수세하는 수준의 세(貰)를 받자는 것이다. 민폐를 없애고 울릉도 수토시의 경비도 원활히 마련할 수 있는 이 같은 방안의 실행 조건을 절목으로 만든 것이다.

2. 대풍감(待風坎)

울릉도 태하리에는 유인 등대가 있고, 그 아래에 대풍령(待風嶺) 또는 대풍감(待風坎)이라는 곳이 있다. 이 고개 밑은 깊은 바다이며, 이곳은 옛날부터 배가 많이 드나든 곳이었다. 배들을 매어두기 위해 이곳에 구멍을 뚫었다. 당시의 배들은 거의가 범선이기 때문에 바람이 불어야 항해할 수 있었으므로 바람을 기다린다고 해서 대풍령이라고 하였다.

이곳이 위치한 태하리는 조선시대에 울릉도를 수토하러 갈 때 주로 상륙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즉,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구산리에 위치한 대풍헌에서 기다리면서 날씨를 보아서 구산포에서 울릉도로 출발하였고, 울릉도의 대풍감에 도착하여 수토를 한 후 다시 이곳을 출발하여 대풍헌이 있는 구산포로 돌아왔을 것이다. 결국, 이곳은 울진군 기성면에 있는 구산포와 연결되어 있던 울릉도의 대표적인 나루였던 셈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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