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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500533
한자 金玉均
영어음역 Gim Okgyun
이칭/별칭 백온(伯溫),고균(古筠),고우(古愚).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울릉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박상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정치가
출신지 충청북도 공주시
성별
생년 1851년연표보기
몰년 1894년연표보기
본관 안동(安東)
대표관직 호조참판

[정의]

조선 말기 동남제도개척사겸관포경사를 지낸 문신.

[개설]

김옥균은 1883년(고종 20) 4월 동남제도개척사겸관포경사로 울릉도에 이주민들을 정착시켰는데, 당시 이주민의 대다수가 남해안과 호남의 어민들이었다. 그들은 울릉도 앞마당인 우산도[현 독도]에 고기잡이를 나가면서 우산도를 ‘돌섬’이라는 뜻의 호남 방언 ‘독섬’이라 호칭하였는데 오늘날 독도를 가리키는 말의 유래가 되기도 한다.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균(古筠)고우(古愚). 김병태(金炳台)의 장남으로, 7세 때 당숙 김병기(金炳基)에게 입양되었다.

[활동사항]

1872년(고종 9)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고, 1874년(고종 11) 홍문관교리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부터 정치적 결사로서 개화당의 형성에 진력하여 다수의 동지를 모아 지도자가 되었다. 1879년(고종 16) 김옥균은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을 일본에 파견해 일본의 근대화 실태를 알아보게 하였으며, 신사유람단의 파견을 주선하도록 하였다. 또한, 국내에서는 혁신의 뜻이 있는 관리들과 청년들을 모아 개화당의 세력 확장에 노력하고 있었다.

1881년(고종 18) 음력 12월 김옥균은 스스로 일본의 근대화 실정을 시찰하려고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일본의 명치유신의 진전과정을 돌아보고 일본의 대표적인 정치가들과도 접촉하여 그들의 정치적 동향 등을 상세히 파악하였다. 돌아오는 도중에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에 이르렀을 때, 본국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귀국하였다.

임오군란이 수습되고 나서 승정원우부승지·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이조참의·호조참판·외아문협판(外衙門協辦) 등의 요직을 거치면서 자주근대화와 개화당의 세력 확대에 진력하였다. 임오군란 후 1882년(고종 19) 9월 김옥균은 수신사 박영효(朴泳孝)의 고문이 되어 제2차로 일본에 건너갔다. 수신사 일행을 먼저 귀국시키고 서광범(徐光範)과 함께 더 체류하면서 본국으로부터 유학생을 선발해 보내도록 하여 일본의 여러 학교에 입학시킨 다음 1883년(고종 20) 3월에 귀국하였다.

1883년(고종 20) 3월 귀국과 동시에 동남제도개척사겸관포경사로 임명되었으며, 1883년(고종 20) 4월에 개척민을 모집하여 울릉도에 이주민 16호 54명을 정착시켰다. 1883년(고종 20) 6월 고종의 위임장을 가지고 제3차로 일본에 건너가서 국채를 모집하려고 하였다. 당시 김옥균은 울릉도 동남제도개척사겸관포경사로서 울릉도의 자원과 동해에서의 고래잡이를 담보로 일본과 거액의 차관을 교섭하고자 하였고, 울릉도 규목(槻木)을 벌채하여 일본에 판매하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에 김옥균의 측근인 백춘배와 선박 만리환의 일본인 선장 도변말길(度邊末吉)이 규목 반출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묄렌도르프와 수구파의 사주를 받은 주조선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가 김옥균이 휴대한 고종의 국채위임장이 위조된 것이라고 본국에 허위 보고하였다. 이로써 국채 모집은 완전히 실패하고 1884년(고종 21) 4월 김옥균은 일본에서 귀국하였다.

김옥균은 세 차례에 걸친 도일 과정에서 앞으로 닥쳐올 나라의 위기를 매우 급하게 느껴 더욱 초조해졌다. 김옥균이 개화정책을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청국과 수구파와의 정치적 갈등과 대립은 더욱 심하여졌다. 이에 그는 정변(政變)의 방법으로 먼저 정권을 장악하여 나라를 구하기 위한 위로부터의 대개혁을 단행할 것을 모색하게 되었다.

청국과 프랑스가 안남 문제를 둘러싸고 청·불전쟁의 조짐을 보이자, 1884년(고종 21) 5월 청국은 조선에 주둔시킨 3천 명의 청군병력 중에서 1,500명을 안남전선으로 이동시켰다. 1884년(고종 21) 8월 마침내 청·불전쟁이 일어나 청국은 연전연패하였다. 이에 김옥균은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고, 1884년(고종 21) 9월 개화당 동지들과 함께 정변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1884년(고종 21) 10월 30일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가 일본에 갔다가 서울로 귀임하였으며, 종래의 개화당에 대한 적대정책을 바꾸어 개화당에 접근하였다. 이에 김옥균은 정변에 대한 청군의 무력개입을 막는데 일본군을 이용하려고 조선군 1,000명 이외에 일본공사관 호위용 일본군 150명을 정변에 끌어들이는 계획을 세웠다. 1884년(고종 21) 12월 4일 저녁 우정국 준공 축하연을 계기로 마침내 갑신정변을 단행하였다. 갑신정변 당일 밤 사이에 수구파 대신들을 처단하고, 다음 날 12월 5일 이재원(李載元)[고종의 종형]을 영의정으로, 홍영식(洪英植)을 좌의정으로 한 개화당의 신정부를 수립하였다.

김옥균은 신정부에서 판서가 임명되지 않은 호조참판을 맡아 재정권을 장악하고 실질적으로 정변과 신정부를 모두 지휘하였다. 개화당은 정권을 장악하자 12월 5일 저녁부터 6일까지 밤을 새워가며 회의를 열어 김옥균의 주도 하에 혁신정강(革新政綱)을 제정하였다. 1884년 12월 6일 오전 9시경에 고종의 전교형식(傳敎形式)을 빌려 정강을 공포하였으며, 동일 오후 3시에는 고종도 추인하여 대개혁정치를 천명하는 조서를 내려 국정 전반의 대개혁이 이루어질 듯하였다.

그러나 청군 1,500명은 1884년 12월 6일 오후 3시부터 무력 개입을 시작하여 불법으로 궁궐에 침입·공격해 들어왔다. 외위(外衛)를 담당했던 조선군이 청군 침략군에 저항하다가 패퇴하였다. 그러자 중위(中衛)를 맡았던 일본군도 개화당이 사태를 수습할 사이도 없이 도망쳐 버렸다. 이처럼 청군의 무력 공격을 방어하지 못해 갑신정변은 실패했고, 김옥균 등 개화당의 집권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김옥균은 후일의 재기를 기약하고 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9명의 동지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나, 일본 정부는 망명한 그를 박해하였다. 1886년 8월 오가사와라쇼도[小笠原諸島]에 귀양을 보냈으며, 1888년에는 홋카이도[北海道]로 추방하여 연금시켰다. 그 뒤 동경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어 1894년 3월 청국의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수구파가 보낸 자객 홍종우(洪鍾宇)에게 상해 동화양행(東和洋行) 객실에서 암살당하였다. 청국과 수구파 정부는 야합하여 시체를 서울 양화진(楊花津)에 실어다가 능지처참하였다.

[학문과 사상]

김옥균은 11세 때인 1861년(철종 12) 양부 김병기가 강릉부사가 되어 임지로 가자, 양부를 따라 강릉에 가서 16세까지 율곡사당(栗谷祠堂)이 있는 서당에서 율곡 학풍의 영향을 받으면서 공부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뿐 아니라 문장·시·글씨·그림·음악 등 예능부문에서 탁월한 소질을 발휘하였다.

김옥균은 대략 1870년(고종 7)부터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을 배우고 발전시켜 개화사상을 가지게 되었으며, 1881년(고종 18) 일본을 여행하고 돌아와서, 일본이 동양의 영국과 같이 되어가는 것을 보고 조선은 동양의 프랑스와 같이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를 만들어야 나라의 완전 독립을 성취하여 유지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정치 전반에 대경장개혁(大更張改革)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양반신분제도의 폐지, 문벌의 폐지,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인재의 등용, 국가재정의 개혁, 공장제도에 따른 근대 공업의 건설, 광업의 개발, 선진 과학기술의 도입과 채용, 상업의 발달과 회사제도의 장려, 화폐의 개혁, 관세 자주권의 정립, 농업과 양잠의 발전, 목축의 발전, 임업의 개발, 어업의 개발과 포경업의 개발, 철도의 부설과 기선 해운의 도입, 전신에 따른 통신의 발전, 인구 조사의 실시 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학교를 널리 설립하고 신교육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자주 국방력 양성, 경찰제도의 개혁, 형사행정의 개혁, 도로의 개선과 정비, 위생의 개혁, 종교와 신앙의 자유 허용, 조선의 중립화 등도 주장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1881년(고종 18) 제1차 도일 직후에 『기화근사(箕和近事)』를 편찬하였으며, 제2차 도일 시에 일본에서 『치도약론(治道略論)』을 저술하였다. 1885년(고종 22) 일본 망명 중에 갑신정변을 회고하면서 일기 형식의『갑신일록(甲申日錄)』을 저술하였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충달(忠達)이며, 1894년(고종 31) 7월 갑오경장으로 개화파 정부가 수립되자 이듬 해 법부대신 서광범과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의 상소에 의해 죄를 사면하고 복권되었다. 1910년(순종 4) 규장각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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