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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500553
한자 朴泳孝
영어음역 Bak Yeonghyo
이칭/별칭 자순(子純),춘고(春皐),현현거사(玄玄居士),무량(無量)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울릉군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이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기도 수원
성별
생년 1861년연표보기
몰년 1939년연표보기
본관 반남(潘南)
대표관직 내부대신

[정의]

조선 말기 내부대신을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자순(子純), 호는 춘고(春皐)현현거사(玄玄居士), 초명은 무량(無量). 판서 박원양(朴元陽)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이고 큰 형은 박영교(朴泳敎), 작은 형은 박영호(朴泳好)이다.

[활동사항]

1872년(고종 9) 철종의 부마가 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별하였다. 금릉위(錦陵尉) 정1품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에 봉해졌다. 큰형 박영교를 따라 박규수의 사랑을 출입하면서 오경석·유대치·이동인 등 개화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아 1879년(고종 16)경 김옥균·서광범 등과 개화당을 조직하였다.

박영효는 1882년(고종 19) 9월 임오군란의 사후 수습을 일본 정부와 협의하기 위해 특명전권대신겸제3차수신사로 임명되어 종사관 서광범 등 14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약 3개월간 체류하면서 일본 정계의 지도자와 구미 외교 사절들과 접촉하여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한편, 명치일본의 발전상을 살펴보았다. 이때 항해하는 배 위에서 태극사괘(太極四卦)의 국기를 제정하여 일본에 도착한 직후부터 사용하였다.

1883년(고종 20) 초 귀국하고 나서 한성판윤에 임명되어 박문국(博文局)·순경부(巡警部)·치도국(治道局) 등 삼국(三局)을 설치하여 신문 발간과 신식 경찰제도의 도입, 도로 정비 사업, 유색 의복 장려 등 일련의 개화 시책을 폈다. 그러나 민태호(閔台鎬)김병시(金炳始) 등 수구파의 반대에 부딪혀 박문국·순경부·치도국 등의 삼국은 폐쇄되었고, 광주유수겸수어사(廣州留守兼守禦使)로 좌천되었다. 이때 수어영에 연병대(鍊兵隊)를 신설하여 신식 군대의 양성에 주력하였으나 또다시 수구파가 이를 문제 삼자 사임하였다. 1883년 10월에는 그의 노력으로 『한성순보(漢城旬報)』의 창간을 볼 수 있었다.

이처럼 수구파와의 갈등으로 정계 진출이 계속 좌절되자, 1884년(고종 21) 2월 미국 유람을 계획하였으나, 역시 이뤄지지 못하였다. 이때 개화당 인사들이 정권 장악을 기도하자 이에 가담하였다. 먼저 미국에 협조를 얻고자 접촉하였으나 미국의 불응으로 사태가 어려워지자, 다시 일본에 접근하여 여러 차례의 협의 끝에 군사적 지원에 대한 확약을 받아냈다.

1884년(고종 21) 12월 갑신정변을 일으켜 친청수구파를 숙청하고 혁신 내각을 수립하여 전후영사겸좌포도대장(前後營使兼左捕盜大將) 직을 맡아 병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청국군의 즉각적인 개입으로 정변이 삼일천하로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본국정부의 송환기도와 일본정부의 냉대로 1885년(고종 22)에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다시 간 박영효는 야마자키[山崎永春]로 이름을 고친 뒤 명치학원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우면서 선교사들과 친분을 맺었다. 1893년(고종 30)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등 일본 유력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동경에 친린의숙(親隣義塾)이라는 사립학교를 세워 유학생들의 교육에 힘을 썼다.

1894년(고종 31) 봄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계기로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정부의 주선으로 1894년(고종 31) 8월 귀국하였다. 귀국 뒤에 조선 정부에 친일 세력을 부식하려는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의 지원을 받아 수립된 제2차 김홍집 내각의 내부대신으로 입각하였다. 박영효는 내부대신으로 재직 시 당시 월성만호가 겸하고 있던 울릉도장을 별도로 임명하고 매년 수차례씩 배를 보내어 울릉도 주민의 어려움을 살피게 하였다.

1895년(고종 32)에는 삼국간섭으로 일본 세력이 퇴조하자 불안을 느껴 이노우에의 권고를 무시하고 김홍집파를 내각에서 퇴진시키고 나서 독자적으로 제2차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왕실과 이노우에 공사로부터 배척당하고 1895년(고종 32) 7월 역모를 음모하였다는 협의를 받아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07년(고종 44) 비공식으로 귀국하여 부산에 체류하다가 궁내부고문 가토 마스오[加藤增雄]와 접촉하여 공작을 통해 고종의 특사조칙을 제수 받고 정계로 복귀하였다. 헤이그 특사사건을 계기로 궁내부 대신에 임명되어,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이완용 내각의 고종 양위압력을 무마시키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일본의 회유정책으로 수여한 후작 작위를 받았으며, 1911년 조선귀족회 회장과 1918년 조선은행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1920년에는 동아일보사 초대사장에 취임하였으며, 1926년 중추원 의장, 1932년 일본 귀족원의원, 1939년 중추원부의장 등을 재직하였다.

[학문과 사상]

1888년(고종 25) 초 일본에 있으면서 고종에게 국정 전반에 관하여 13만여 자에 달하는 장문의 개혁상소를 올렸다. 이것이 이른바 ‘개화상소(開化上疏)’ 혹은 ‘건백서(建白書)’이며 봉건적인 신분제도의 철폐, 근대적인 법치국가 확립에 의한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주장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사화기략(使和記略)』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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