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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501378
영어의미역 The People keeping Dokdo: from Yi sabu to Dokdo Guide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황정환

[개설]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에 속하는 독도는 대한민국 최동단에 있는 섬이다. 삼봉도(三峰島)·우산도(于山島)·가지도(可支島)·요도(蓼島)등으로 불리다가 1881년(고종 18)부터 독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독도가 주목받는 것은 한국 동해의 가장 동쪽에 있는 섬이라는 지리적 요인이 작용한 점도 있지만, 특히 한·일 양국간 영유권 분쟁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독도가 울릉도에 부속된 섬으로서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는 문헌은 『고려사(高麗史)』이다. 『고려사』 지리지(地理志)의 동계(東界) 울진현조(蔚珍縣條)에 무릉[울릉도]과 함께 우산[독도]이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이후 1432년(세종 14)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강원도 울진현조에서도 “우산·무릉 두 섬이 [울진]현 정동(正東) 바다 한가운데 있다.”고 기록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512년 울릉도에 세워진 우산국을 정복한 하슬라주 군주(何瑟羅州軍主) 이찬(伊飡) 이사부(異斯夫)야말로 역사적 인물로서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나라 영역으로 이끌어 온 최초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사실을 일본 막부에 확실하게 각인시킨 안용복이야말로 대표적인 독도[울릉도] 지킴이라고 할 만하다.

[우산국을 복속시킨 이사부]

512년(지증왕 13)에 울릉도에 있던 우산국을 신라에 복속시킨 이사부(異斯夫)내물왕의 4대 손이다. 이사부는 505년(지증왕 6) 실직주[삼척]의 군주가 되었다가, 지증왕 13년 하슬라주[강릉]의 군주가 되어 우산국을 정복하려고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우산국 사람들이 사납고 거칠어 힘으로 굴복시키기가 어렵자 이사부는 한 꾀를 생각해 냈다. 이사부는 나무로 허수아비 사자를 많이 만들어서 배에 싣고 우산국 해안에 이른 후,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곧 이 사나운 사자들을 풀어 모조리 밟혀 죽게 하리라.” 하고 위협하였다.

그러자 우산국 사람들은 이사부가 생각했던 대로 순순히 항복하고 매년 조공을 바치겠다고 하였다. 그후 우산국은 신라뿐 아니라 고려왕조 이후에도 내륙의 왕조와 조공 관계를 맺고 토산물을 바쳐 왔다. 따라서 우산국을 신라에 복속시킨 이사부야말로 울릉도와 독도가 신라에 복속된 근원을 제시한 최초의 역사적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민간외교가 안용복]

조선 후기에 당시 동래부였던 부산 좌천동에서 태어난 안용복(安龍福)[1652~?]은 젊은 날 좌수영의 능로군으로 있었다. 능로군이란 노를 젓는 사람을 말한다. 안용복은 당시 부산포에 있던 왜관에 출입하면서 일본말을 배웠다. 1693년 능로군으로 군역을 마친 뒤 어민 40여 명과 함께 울릉도 부근으로 전복을 따러 나갔던 안용복은, 그곳에서 일본의 오오야 가문 어부들과 부딪쳤다. 당시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오오야에게 ‘도해면허’를 주어 울릉도와 독도 근해에서 어로 활동을 하게 하였다.

안용복은 일본 어부들에게 왜 남의 바다에 와서 고기를 잡느냐고 항의하다 숫적인 열세에 밀려 일본의 오키시마[隱岐島]로 납치되고 만다. 18세기 일본 사학자 오키시마가 쓴 『죽도고(竹島考)』에 따르면, 당시 안용복은 서른여섯 살이었으며, 키가 작고 검은 얼굴이었다고 한다. 안용복은 오키시마로 끌려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도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임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얼마 후 안용복은 죄인 신분으로 다시 요나코를 거쳐서 도쿠가와 막부로 끌려갔다. 일본측 문헌인 『통항일람』의 기록에 따르면, 안용복은 막부의 조사에서도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에서 불과 하루 거리이지만, 일본 땅에서는 닷새 거리이므로 분명히 우리 땅”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결국 안용복의 주장에 굴복한 도쿠가와 막부는, 안용복에게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라는 서계를 건네주고 풀어준다. 일본측 자료인 『인부연표(因府年表)』의 당시 기록에는 안용복을 송환할 때 호송사 두 명, 요리사 세 명, 병졸 다섯 명 등을 딸려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안용복은 송환 도중 나가사키에서 대마도주에게 서계를 빼앗기고, 다시 대마도에 90일 동안 구금된다. 구금에서 풀려나 조선으로 송환된 뒤에도 안용복은 부산의 왜관에 50일 동안 구금되어 있었다. 대마도주가 서계의 내용을 뜯어 고쳐서 울릉도와 독도의 관할권을 주장한 것은 당시 대마도 사람들이 울릉도 근해로 북류하는 쿠로시오 해류를 이용하여 울릉도와 독도 부근으로 어로를 많이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 조정은 울릉도에 농토가 없고 땅이 척박하여 사람들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수토정책(搜討政策)을 써왔다. 그 틈을 타서 1618년 도쿠가와 막부가 오오야 가문에 도해면허를 내준 것이었다. 당시 노론이 지배하던 조정은 임진왜란 후 일본국과의 국교를 고려하여 안용복 문제에 소극적이었다. 오히려 양국간에 불씨를 만든 안용복을 은근히 나무라는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장희빈이 축출되고 인현왕후가 복권되면서 소론이 득세하게 되었는데, 소론은 노론과는 달리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서계를 일본 막부에 보냈다. 이에 대해 일본 막부는 1696년 1월 28일 일본인들의 울릉도와 독도 근해에 대한 도해 금지 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직접적인 이해 관계에 있는 대마도주는 도쿠가와 막부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우리 조정에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이에 안용복은 ‘울릉우산양도감세관’이라고 자칭하고 울릉도로 건너가 일본인들을 내쫓고, 그 길로 일본으로 들어가 강력한 항의 끝에 다시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땅이 아니다”는 확약을 얻어낸 뒤 대마도주가 말을 듣지 않자, 대마도주가 조선조정으로 보내는 일본 막부의 물자들을 횡령한 사실을 일본 막부에 알리겠다고 협박하여 완전한 굴복을 얻어냈다. 『번례집요』가 바로 그것이다. 『번례집요』에서 대마도주는 비로소 울릉도와 독도의 조선 영유권을 인정하고 있다.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온 안용복은 이 사실을 비변사에 알렸으나 조정에서는 함부로 벼슬을 사칭하고 양국간에 외교 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안용복을 체포하였다. 그리하여 안용복은 함부로 국경을 넘나들었다는 범경죄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남구만과 몇몇 신하들이 나서서 그간의 공적을 변호해 주어 간신히 유배형으로 감형을 받았다.

안용복과 관련한 기록은 거기에서 끝이 나 있다. 어디로 유배를 갔는지, 언제 죽어서 어디에 묻혔는지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다. 『고암집』에는 안용복이 유배지에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곳이 어디인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안용복 이후 조선조정에서는 울릉도와 독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2년에 한 차례씩 울릉도와 독도를 순시하도록 하였다.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는 안용복과 관련한 일을 기록하며 “안용복은 영웅에 비길 만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울릉도검찰사 이규원]

1882년(고종 19) 울릉도검찰사로서 울릉도[독도 포함]를 시찰하고 돌아온 이규원(李奎遠)[1833~?]은 천혜의 보고인 울릉도와 독도에 왜인들이 침입, 벌목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땅인 것처럼 입표까지 한 것에 분개하여 일본공사에 항의하고, 일본 외무상에 항의문서를 발송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고종은 그간의 수토정책을 버리고 울릉도 개척에 착수하는 한편 일본 정부에 재차 항의하도록 하였다. 그후 이규원「울릉도검찰일기(鬱陵島檢察日記)」를 조정에 제출하였고, 이를 통해 조정은 일본에 항의 공문을 보내고 울릉도에 주민을 이주시키도록 조치하였다.

[독도의 지킴이 홍재현 일가]

홍재현(洪在鉉)[1815~1822 이후]은 조선시대 호조참판을 지내다 울릉도에 유배된 조부를 따라 울릉도에 정착한 인물이다. 홍재현은 독도에 나타난 왜인들을 물리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고히 밝히고 돌아왔다. 그후 계속되는 일본인들의 독도 침입은 아들인 홍종욱이 대를 이어 막아냈다. 손자인 홍순칠은 한국전쟁 중에 우리 행정력의 공백기를 틈탄 일본인의 왕래를 막기 위해 울릉도에 거주하는 전역군인들을 모아 독도의용수비대를 만든 뒤, 울릉도 경찰서장의 지원하에 독도를 지켜 왔다.

[독도박물관장을 역임한 이종학]

양녕대군의 21대 손인 서지학자 이종학(李鍾學) 전 독도박물관장은 40년간 사재를 털어 일제가 왜곡한 우리 역사를 바로 찾기 위해 자료를 수집해 왔다. 그리하여『동학사료총서』·『화성성역의궤』 등 10종 40여 권에 달하는 자료집을 냈고, 독도가 우리 땅임을 말해 주는 일본 해군성 「수로지(水路誌)」, 독도의용수비대장 홍순칠의 유품 등 총 351종 512점을 1997년 삼성문화재단이 지은 독도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울릉경찰서 소속 독도경비대]

울릉경찰서 소속 독도경비대는 1948년 6월 8일 미공군이 폭격 연습을 하던 도중 독도에서 미역을 채취하던 어민 30명을 죽인 사건 이후 조직된 부서이다. 1953년 7월 12일 소형 경비선으로 독도를 순찰하던 중 일본 순시선 ‘해구라’가 우리 영역을 침범해 오자 이에 대응하는 등, 독도경비대는 1951년에서 196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약 10여 년 동안 독도를 지키는 데 앞장섰다.

[경북지방경찰청 독도경비대]

현재의 독도경비대는 경북지방경찰청 소속으로 1개 소대 규모의 병력이 독도 경비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일본 순시선 등 외부 세력의 독도 침범에 대비하여 첨단과학 장비를 이용하여 해안 경계를 하고 있다. 유사시 인근에 있는 해경과 해군, 공군과 통신이 가능한 통신시설을 갖추고 영해를 침범하는 외부 세력을 관계기관에 통보하여 저지토록 하고, 불법으로 독도에 접안할 시 체포, 또는 나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독****** 독도를 지키신 위인들을 더 올려주었스면 더 좋겠습니다.
  • 답변
  • 디지털울릉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향후 울릉문화대전을 보완할 때 내용을 보완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이용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2015.10.21
독*** 안녕하십니까? 독도를 관심이 있는 한 학생입니다. 염치가 없지만 제가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교내상에 관련된 수행평가를 하려는데 제가 독도에 대하여 지식이 없는지라 위 글을 토대로 기본적인 것을 담아 제 방식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출처를 밝혀도 되겠습니까? 제가 저작권에 민감해서 그럽니다 죄송합니다.
  • 답변
  • 디지털울릉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이용 부탁드리며, 인용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4.10.21
리* 이번에 학교에서 독도에 관한 조사 숙제를 받았습니다. 출처를 밝히고 정보를 가져가 사용하려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 답변
  • 디지털울릉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이용 부탁드리며, 인용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4.08.22
독*** 교내상을 받아 어떤 대회에 출품을 하게 된다고 선생님께서 그러십니다. 대회 내에서 저작권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데, 기본 개념을 가지고 제 방식으로 꾸며보았습니다. 그러나 혹시 몰라서 그럽니다. 시간도 없고 그런데 저작권에 대한 동의를 구하려고 합니다. 이 경우에는 영리의 목적이 들어있지않습니까? 시간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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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지털울릉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청각 자료 활용시 상업적 용도 사용은 금하며,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4.07.01
독*** 안녕하십니까? 독도를 관심이 있는 한 학생입니다. 염치가 없지만 제가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교내상에 관련된 수행평가를 하려는데 제가 독도에 대하여 지식이 없는지라 위 글을 토대로 기본적인 것을 담아 제 방식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출처를 밝혀도 되겠습니까? 제가 저작권에 민감해서 그럽니다 죄송합니다.
  • 답변
  • 디지털울릉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이용 부탁드리며, 인용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4.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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