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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에서 무보수 농협장으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5A03060008
지역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고경래

“교직을 천직으로 알고 교직에 들어 와 내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하였는데, 3년여 만에 본의 아니게 직장을 잃어버리니, 이제는 혼자 몸도 아니고 벌써 가족이 셋이나 되어 살아 갈 길이 막막하였다.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되는 것은 농토가 있어 땀 흘려 노력하면 식생활 해결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막상 남양을 떠날려니 신학기 들어 새로 맡은 6학년 어린이 43명을 맡을 담임이 없었다. 아이들은 매일같이 찾아 와 눈물로 지새우며 울부짖는 바람에 발걸음을 옮기지도 못하고 다른 선생님들은 화풀이로 매일같이 술타령인데, 나는 그 자리에 합석하지도 못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주인 없는 교실에서 약 2주 동안 수업을 하였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언제까지나 여기에 이렇게 지낼 수만은 없었다. 하루는 아이들에게는 말하지 않고 배를 빌려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싣고 현포로 향하였다. 현포 부두에 배를 닿아 짐을 풀고 이웃사람들이 이삿짐을 나르는 동안 고향의 선배들이 몇 사람 오시어 마음도 착잡할 터인데 약주나 한 잔 하자면서 주막집으로 데리고 갔다.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나누던 중 선배 분이 ‘현재 현포에 농협장이 없으니 자네가 현포 농촌을 위하여 좀 노력해 주어야겠네.’ 하면서 농협 사무를 맡으라는 것이었다.

당시 현포 농협은 울릉군 이동 농협 중에서 가장 소득도 높고 조합원수도 제일 많았고, 조합의 부수적 사업으로 정미소·이발소 등이 있어 한 사람 일거리는 족히 되고도 남음직하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농촌에서 태어나서 불과 한 3년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도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는 흙과 벗 삼았는데 억지로 사양할 수가 없었다.

현포 농협장을 맡아서 4년 8개월 동안 조합원들의 심부름꾼이 되어 내 나름대로는 젊음을 바쳐 열심히 하였다. 서울에 있는 홍농종묘사 회원으로 가입하여 각종 신품종을 무료 공급을 받아 농장에다 파종을 하고 시험한 결과 토질과 기후에 알맞은 품종을 선택하여 농촌에 공급시켜 소득증대에 이바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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