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산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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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태하리에는 유인등대가 있고, 그 아래에 ‘대풍령(待風嶺)’이라는 고개가 있다. 이 고개 밑의 바다는 수심이 깊다. 이곳은 옛날부터 배가 많이 드나들었는데, 이 배들을 매어두기 위해 이곳에 구멍을 뚫었다. 당시의 배들은 거의가 돛배이기 때문에 바람이 불어야 항해가 가능하였으므로 바람을 기다리는 곳이라고 ‘대풍령’이다. 이 언덕에는 작은 구멍뿐만 아니라 큰 굴이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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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고종 20) 이규원이 저술한 울릉도 검찰일기. 1881년(고종 18) 울릉도 수토관(搜討官)은 일본인들이 울릉도의 규목을 몰래 베어 가는 등 울릉도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강원감사에게 보고하였고, 강원감사는 이 사실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에 보고하였다. 조정에서는 일본 정부에 항의 공문을 발송하게 하는 동시에 대책 마련을 위해 부호군 이규원(李奎遠)을 울릉도검찰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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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4월) 27일 평해읍(平海邑)에서 10리쯤 떨어진 구산포(邱山浦)에서 바람을 기다리다가 29일에 순풍(順風)을 만나 중추원도사(中樞院都事) 심의완(沈宜琬)과 군관출신(軍官出身) 서상학(徐相鶴), 전수문장(前守門將) 고종팔(高宗八),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 유연호(劉淵祜)와 사공, 격군 등 82명, 포수(砲手) 20명을 3선(船)에 나누어 싣고 당일 오전 8시쯤에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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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울릉도 역사. 울릉도는 고려 말 왜구 때문에 무인도가 되었으나, 조선 초 이래 육지의 백성들이 계속 건너가 살았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도 울진현(蔚珍縣)에 소속되었지만, 이곳이 왜구의 거점이 된다고 하여 조선 전기에는 쇄환정책(刷還政策), 조선 후기에는 수토정책(搜討政策)을 시행하였다. 그리하여 본토로부터 울릉도에 들어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