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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500857
한자 書堂
영어음역 Seodang
영어의미역 Private school for the study of Chinese Classics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울릉군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장두민

[정의]

근대 공립 교육기관이 설립되기 전 경상북도 울릉군에서 초등 교육을 담당했던 사설 교육기관.

[개설]

신교육이 실시될 때까지 가장 보편화된 교육기관이었던 서당은 민간 사설 교육기관으로 오늘날의 초중등교육을 담당하던 기관이다. 기원은 고구려의 경당(扃堂)에 있으며, 고려와 조선을 거쳐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교육기관이다.

일반적으로 서당은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도 맡아 하였다. 주민들은 마을의 대소사를 훈장에게 의논하였으며, 훈장은 때때로 분쟁에 대한 판결, 또는 지혜를 제공하는 역할도 하였다.

[변천]

조선 말기 개척 이전까지 울릉 지역에는 마땅한 교육기관이 없었으나 개척 이후 육지에서 온 교육자들이 서당을 설립하거나, 뜻있는 주민들이 힘을 모아 본토에서 훈장을 초빙하여 서당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까지 이렇게 설립된 서당이 약 14개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울릉 지역에는 공립교육기관이 없었는데, 이 때문에 일본은 서당에서 일어 교육을 강요하였고, 이를 수용하지 않은 서당은 폐쇄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중저서당을 비롯한 일부 서당에서는 일본 관리의 눈을 속여 가며 『동몽선습(童蒙先習)』 등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곧 발각되었고, 광복 2년 전인 1943년까지 울릉 지역에 있던 모든 서당은 폐쇄되었다. 그러나 간령서당의 경우 이후 울릉공립보통학교 부설 장흥간역학교가 되었는데, 이는 현재 장흥초등학교의 전신이기도 하다.

[운영]

울릉 지역 서당에서는 『천자문(千字文)』을 비롯한 『사자소학(四字小學)』, 『동몽선습』, 『명심보감(明心寶監)』, 『소학(小學)』, 『대학(大學)』 등 경서 강독을 비롯하여 습자 등을 가르쳤다. 당시 서당에서 사용한 자료들은 현재 향토사료관에 보관 전시되어 있다.

서당의 교육료는 정해진 바가 없었다. 일정 금액을 받지만, 개인 사정에 따라 일 년어치를 한꺼번에 지불하기도 하는데, 대부분 농산물이나 해산물 등의 물목으로 지불하였으며, 일부는 산나물 등으로 대신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규모가 크거나 저동과 같은 지역의 큰 서당에서는 대부분 현금으로 교육료를 지불하였다.

[주요 서당]

1. 간령서당

울릉군 사동3리에 위치했던 간령서당(簡嶺書堂)은 김광호가 옥류재에서 이주한 후 건립하였다. 정확히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동리 일대의 교육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4년 6월 3일자로 울릉공립보통학교 부설 장흥간역학교가 되었다.

2. 나리서당

개척 당시 울릉군 북면 나리는 우리나라 사람들만 5백여 명이 넘게 거주하던 지역이었다. 나리서당(羅里書堂)은 나리에서 유일한 교육기관으로, 울릉 지역 내에서도 가장 큰 서당이었다. 당시 낙영재라는 재실을 이용하여 서당을 운영하였다고 하는데, 훈장은 이기락이었다. 인구가 감소된 일제강점기 중엽 폐쇄되었다.

3. 사동서당

울릉읍 사동1리에 위치했던 사동서당(沙洞書堂)의 훈장은 김광호(金光鎬)였다. 당시 김광호는 육지에서 감찰 벼슬을 하여 울릉 지역 내에서 속칭 김감찰로 통하였으며, 개척 당시 울릉도의 교육 공로자로 알려져 있다. 사동서당은 김광호가 사동3리로 이주하면서 폐쇄되고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는데, 김광호는 1910년 11월 18일 도동리에 신명학교를 건립하여 교장을 겸임하였다.

4. 석포서당

울릉군 북면 천부3리에 위치했던 석포서당(石圃書堂)은 박시순(朴時徇)이 훈장으로 있다가 울릉읍 사동2리 옥천으로 이주하면서 폐쇄되었다. 당시 서당이 있던 자리는 밭으로 변했는데, 이곳을 사람들은 ‘서당등때’라 부른다.

5. 옥천서당

울릉읍 사동2리에 위치했던 옥천서당(玉川書堂)의 훈장은 박시현으로 알려져 있다. 박시현이 북면에서 석포서당을 하다가 사동리로 이주하여 옥천서당을 설립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중엽에 폐쇄되었는데, 터는 전하지 않는다.

6. 운수서당

울릉읍 사동1리에 위치했던 운수서당(雲樹書堂)의 초대 훈장은 임자봉으로 알려져 있으며, 2대 훈장은 황하은이었다. 서당 개설 당시 20여 명의 서당생이 있었으며, 폐쇄될 때까지 약 7~12명의 서당생이 공부를 하였다. 운수서당 터는 현재 밭으로 활용되고 있다.

7. 학포서당

울릉군 서면 태하2리에 위치했던 학포서당(鶴圃書堂)의 훈장은 김홍기(金弘基)였다. 저동에서 중저서당의 훈장을 하다가 태하리로 이주하면서 학포서당을 차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중엽 폐쇄되었으나 현재 터는 전하지 않는다.

8. 중저서당

울릉읍 저동1리에 위치했던 중저서당은, 서당 건립 당시 육지에서 훈장을 초빙하여 3년간 아이들을 가르치게 하는 등 교육열이 남다른 곳이었다. 그후 김홍기에 이어 손순섭(孫純燮)이 훈장을 역임하였다.

일제강점기 중엽 서당에서도 일본어를 가르치라는 일제의 압력이 거세지자 중저서당 출신 김영수(金永洙)를 접장(接長)으로 기용한 뒤 일본어 교습을 하는 척하며 『동몽선습』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어 1943년 결국 폐쇄되었다. 중저서당은 수백 명의 문도를 배출하는 등 울릉 지역에서는 가장 오래 문을 연 장수 서당으로, 지역 일꾼을 다수 배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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