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442 |
---|---|
한자 | 三奇里三奇亭 |
영어공식명칭 | Samgijeong Pavilion in Samgi-ri |
분야 | 문화유산/유형 유산,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남해경 |
건립 시기/일시 | 1439년 - 삼기리 삼기정 건립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75년 - 삼기정유허비 건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0년 - 삼기리 삼기정 복원 |
현 소재지 | 삼기정 -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
원소재지 | 삼기정 -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
성격 | 누정 |
양식 | 겹처마에 팔작지붕 양식 |
정면 칸수 | 정면 2칸 |
측면 칸수 | 측면 2칸 |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에 있는 누정.
[개설]
삼기리 삼기정을 세운 최득지(崔得之)는 본관이 전주이고 호는 율헌(栗軒)이며, 1413년(태종 13)에 장흥교수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아가 1439년(세종 21)에 고산현감이 되었다.
[위치]
삼기리 삼기정은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의 전주-대전을 잇는 7번 국도의 삼기교차로 우측 언덕 위에 있는 정자 건축이다. 주변에는 들판이 펼쳐져 있고 좌우로 고산천이 흐르고 있다. 후면에는 낮은 야산이 있어 경관이 수려하다.
[변천]
『고산읍지(高山邑誌)』에 의하면 1439년(세종 21)에 율헌 최득지가 초창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기정을 건립하게 된 연유는 1422년(세종 4)에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인 하연(河演)이 전라관찰사가 되어 관내를 순시하던 중 고산현에 들렀다가 현재의 삼기리로 소풍을 나갔는데, 이 때 그곳의 냇물, 돌, 소나무 등이 한데 어울려 한 폭의 그림 같은 경관을 이룬 것을 보고 마음이 쏠려 ‘세 가지가 기특하다’는 뜻으로 ‘삼기(三奇)’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한다. 이에 고산현감이었던 최득지가 정자를 세우고 하연에게서 기문을 받아 ‘삼기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삼기리 삼기정은 오랜 세월 동안 퇴락과 중수를 거듭해오다가 1990년에 복원되었다. 1875년(고종 12) 최득지의 후손들이 정자의 자리에 삼기정유허비를 세웠으며, 기우만(奇宇萬)이 비문을 지었다.
[형태]
삼기리 삼기정의 평면은 정면 2칸, 측면 2칸이고 바닥은 누마루로 되어 있으며 마루 주위에는 박쥐 문양이 투각 된 머름형[창 아래 설치된 높은 문지방으로 출입을 위한 문에는 설치하지 않음] 난간을 설치했다. 삼기리 삼기정의 구조는 자연석 화강암 덤벙주초[자연석을 가공하지 않고 주춧돌로 사용한 돌] 위에 두리기둥[둥근 기둥]을 세우고 창방으로 결구하고 있으며 기둥 위에는 첨차를 비교적 길게 한 주심포 양식[공포를 기둥 위에만 배열한 양식]을 하고 있다. 가구는 대들보를 서로 교차한 다음 위에 대공을 세우고 도리를 얹었으며 지붕은 겹처마에 팔작지붕 양식이다. 그리고 목부재는 단청을 입혔다.
[현황]
삼기리 삼기정 내부에는 한말의 의병장이었던 기우만(奇宇萬)[1846~1916]이 1912년에 글씨를 쓴 하연의 「삼기정기」 편액이 걸려 있으며,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이 쓴 ‘삼기정(三奇亭)’이라는 현판이 외부에 걸려 있다. 상량문에는 “檀君紀元四千三百二十三年庚午十一月重建(중략)世宗己未創建”이라 적혀 있어 이들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 「삼기정기(三奇亭記)」에는 ‘맑은 물을 보게 되니 나의 천부의 본성을 더욱 맑게 하고, 바위가 엄엄한 것을 보니 뽑아낼 수 없는 확고한 신념을 더욱 굳게 하며, 소나무의 변하지 않는 푸른 벌을 보게 되니 곧고 굳은 절개를 더욱 높게 한다’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