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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002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찬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종가 영천 정용준씨 가옥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선원연정길 49-10[선원리 131]지도보기
정사 함계정사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선원연정길 3-10[선원리 203-2]지도보기
고택 괴헌고택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선원연정길 53[선원리 126]지도보기
고택 송고헌고택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선원연정길 17-15[선원리]지도보기
고택 정경식가옥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선원연정길 43-10[선원리]지도보기
고택 정기인가옥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선원연정길 52[선원리]지도보기
고택 정동우가옥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선원연정길 17-16[선원리]지도보기
정자 동연정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선원연정길 40[선원리 169]지도보기
정자 학파정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선원연정길 23-5[선원리]지도보기
재실 경괴재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선원연정길 32-17[선원리 90]지도보기
재실 송원재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선원연정길 3-12[선원리 204]지도보기

[개설]

선원마을은 조선 인조호수(湖叟) 정세아(鄭世雅)[1535~1612]의 장손인 정호례(鄭好禮)[1604~1672]가 입향해 세거한 영천의 대표적인 동족마을로,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 지역이다.

선원마을자호천선원천을 곁에 두고 그 뒤로 해발 200m 내외의 학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어 주변 산수가 너무 아름다워 도연명(陶淵明)의 무릉도원에 비유하여 선원(仙源)이라 부른 것이 마을 이름이 되었으며, 그 후 영일 정씨(迎日鄭氏)가 주성(主姓)으로 세거해 오고 있다.

[입향조 정호례]

선원마을 입향조 정호례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방손(傍孫)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하여 공신이 된 영일인(迎日人) 호수 정세아의 장손이다. 정호례는 자가 자립(子立)로, 정세아의 넷째 아들로 내금위장(內禁衛將)을 역임한 정수번(鄭守藩)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정세아의 맏아들인 정의번(鄭宜藩)의 양자로 갔다.

그 뒤 정호례의 손자인 함계(涵溪) 정석달(鄭碩達)[1660~1720]이 선원마을에 입향하여 개인적 유교 학문 정신을 고양시킬 뿐만 아니라 강학을 통해 문풍을 진작시키고 지역 사회 교화에 힘썼다. 정석달은 성리학자로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과 학문을 강론하며 일생을 보냈고, 문집으로는 『가례고증』이 있다.

한편 정석달의 두 아들 중 장남인 매산(梅山) 정중기(鄭重器)[1685~1757]가 영천시 임고면 삼매리의 매곡마을에 입향해 세거했고, 차남은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에 입향하여 세거했으며, 삼남이 다시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에 세거해 오고 있다.

[이상향을 찾아서]

조선 시대 사대부들의 의식을 지배한 것은 성리학이였다. 특히 영남 지방은 고려 무신 집권기 때 재경문신(在京文臣)들이 낙향 생활의 근거처로 삼은 경우가 많아 자연스럽게 영남 지방의 문풍이 일찍이 진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확산된 성리학은 15세기 후반부터 지방 중소 지주층 사대부를 중심으로 이른바 사림파(士林派)를 형성시켰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유교적 촌락 공동체 형성을 통하여 유교 문화를 자신의 향촌에 보급하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16세기 사화(士禍)를 겪은 사림파 유학자들이 낙향하여 향촌에 은거함에 따라 유교 문화의 중심이 중앙보다 사림파의 본거지인 영남 지방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향약(鄕約) 시행을 통한 유교적 향촌 질서 확립과 서원(書院)을 중심으로 지역 문화 형성을 도모하게 되었다.

선원마을 역시 자연 합일의 자연관을 배경으로 한 새로운 터전을 결정하였고, 임진왜란과 사화(士禍)로 인한 격변기에 정계에 나서기보다는 처사지향을 추구하기에 합당한 지세와 주변 환경을 가진 선원마을에 터전을 마련해 오늘날까지 그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이어져 오고 있다.

선원마을에는 향촌의 산림에 은둔하며 심신 수행과 학문 연마에 힘쓰고, 지역 사회의 교화에 관심을 기울여 성리학적 질서 체계를 구현할 토대로서 상류 주택을 비롯해 재실·정자·정사 등이 조영되었다. 이는 선원마을이 조선 후기 성리학적 수양·학문·교류 및 은거의 근거지로 삼기에 매우 바람직한 이상향(理想鄕)임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라 하겠다.

[학산은 울고 있다]

선원리의 주변 환경은 동쪽과 남쪽으로 자호천과 그 지류인 선원천이 흐르고, 북으로는 영천시 임고면 덕연리, 남쪽으로는 영천시 화남면, 북쪽으로는 영천시 화북면과 각기 접하고 있다. 선원리에서 영일 정씨가 주로 세거하고 있는 마을은 자호천과 그 지류인 선원천변의 산록에 입지한 대환(大還)[환고(還皐)], 샛말[간촌(間村)], 송내(松內)[선원(仙源)]가 대표적이다. 이들 마을은 학산(鶴山) 자락의 솔밭이 병풍처럼 둘러 쳐져 있고, 마을 앞으로는 자호천변에 굉밭들과 평천들이 넓게 펼져져 있어 가슴이 탁 트이도록 시원스럽다. 또 자호천변으로는 깨끗하고 고운 모래톱이 넓게 펼쳐져 있어 단오 등 마을 행사 때 줄다리기, 그네타기 등이 열리곤 했다.

풍수적으로 볼 때, 선원마을 뒷산의 형태는 학의 모습을 닮은 학산 아래에 학이 날개를 펼친 형태를 하고 있다. 따라서 선원마을의 구성은 학의 형태에 따라 학머리, 날개 부분, 꼬리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학머리에는 마을 내 종가인 중요민속문화재 제107호 영천 정용준씨 가옥이 있고, 그 일족의 가옥들이 학의 날개 부분에 펼쳐져 있다. 학의 꼬리 부분에는 마을 입구의 진입 부분에 위치한 정자목·정자·조앙대·연못 등이 있다.

선원마을은 한국전쟁 이전만 해도 130호 이상에 이르는 큰 마을이었으나, 한국전쟁 때의 폭격 등으로 상당히 많은 집들이 소실되었다. 당시 소실된 집터는 과수원이나 밭으로 변해 옛 정취는 많이 사라진 상태이고, 또 수년 전 태풍으로 집이 상하고 흙 담이 무너지는 등 피해를 입기도 했다.

지금은 70호 정도가 선원마을을 이루고 있으나, 15년 전부터는 타성(他姓)이 15호 가량 차지하고 곳곳에 양옥이 들어서면서 고즈넉했던 마을 풍경은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있다. 마을 풍경은 변하되 옛 것을 사랑하고 조상을 섬기고 부모에 효도하던 마음은 변하지 말길 바랄 뿐이다. 아직도 선원마을의 대소사는 문중 회의를 통해 결정하고, 또 마을 주민들은 그 결과를 믿고 따르고 있다. 특히 마을 묘사(墓祀) 등 제례나 품앗이 등이 비교적 존속하고 있어 일족의 결속과 주민 상호간의 유대감을 강하게 형성해 주고 있다.

한편 대구포항고속도로가 마을의 정기를 간직하고 있는 학산을 절개하고 관통하고 있어, 300년 넘은 동족마을의 전통문화가 단절되는 듯한 아픔과 끊임없이 지나는 자동차 소음으로 주민의 원성이 자자하다.

[학이 품은 마을]

임고면 평천리에서 마을로 들어가면 자호천이 흐르는데, 자호천에 놓은 선원교를 건너면 선원마을 회관이 있다. 선원마을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데, 과거 영천댐이 건설되기 이전에는 자호천의 지류인 선원천 건너편에 위치한 동연정과 주변의 정자목을 지나 마을로 진입하였다. 지금 선원마을 입구의 선원천에는 2012년에 신선교를 놓아 다니기 나아졌다.

선원마을은 아래쪽으로는 동남으로 흐르는 자호천, 위쪽은 학산을 경계로 하여 주변의 산들이 경계를 이루며, 양옆으로는 구릉이 경계가 되고 있다. 한편 선원마을의 외곽으로는 정자와 재실이 위치하고 있는데, 마을의 영역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선원마을은 가장 안쪽 골의 학머리 혈에 종가인 영천 정용준씨 가옥이 있고, 그 앞마을을 관통하는 하천가에 별당인 연정(蓮亭)이 있는데, 연정은 ‘학이 물을 먹는 모습’이라 길지라 한다. 종가가 마을 가장 안쪽 길지에 위치하며, 이곳은 선조의 묘소가 있는 도래솔과 가까운 거리이다. 도래솔은 선원마을 서편에 있는 논 건너편의 송림 속에 있다. 연정은 종가 앞을 흐르는 작은 개천에 인공적으로 조성한 것이나 그 구조 형태는 자연스러워, 주변 자연의 정취를 만끽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예전 종가 위쪽으로도 여러 채의 고가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답으로 변해 옛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종가 아래쪽의 학의 날개 부분으로는 영일 정씨 일가의 가옥을 비롯해 정자·정사·재실 등 생활·교육·여가·의식 공간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고유한 전통 동족마을을 이루고, 꼬리 부분에는 마을 입구의 진입 부분에 선원천·정자목·동영정·조앙대·덕소 등 마을 앞 자연 경관과 마을의 상징성을 돋보일 요소들이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선원마을의 공간 구성은 마을 가장 위쪽에 동족마을의 구심점인 종가가 위치하고, 그 아래쪽의 구릉 사이로 일족의 주거와 정자, 재실을 비롯해 경작지가 다원적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여 방향별 위계성이 뚜렷하다.

마을 경제는 자호천 연안의 굉밭들과 평천들로 벼농사를 비롯해 40~50년 전부터 사과와 복숭아 등의 과수원이 마을의 주 생산 경제를 이루고 있다.

[종택과 정자, 그리고 재실]

선원마을에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07호로 지정된 영천 정용준씨 가옥을 비롯하여 연정(蓮亭)·괴헌 고택(槐軒古宅)·함계정사(涵溪精舍)·정기인 씨 가옥·정경식 씨 가옥·정동우 씨 가옥·송고헌 고택(松皐軒古宅)·동연정(東淵亭)·학파정(學坡亭)·송원재(松源齋)·경괴재(景槐齋) 등 고택과 근대 한옥·정자·재실 등이 남아 있다.

영천 정용준씨 가옥은 현 주인인 정용준 씨의 8대조가 1725년(영조 원년)에 건축한 것으로, 남서향의 본채와 정자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는 전면에 사랑채와 문간채가 一자형으로 합쳐진 것으로 중앙의 안대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을 중심으로 ㄱ자형 평면의 안채와 곳간채, 그리고 아래채가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룬다. 가구(架構)는 안채가 네모기둥에 네모도리로 결구한 3량가의 소로수장 몰익공 구조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에 기와를 이었다. 사랑채도 네모기둥에 네모도리로 결구한 3량가의 장여 수장집이며, 지붕은 곳간채 및 아래채와 함께 맞배지붕에 기와를 이었다.

본채에서 50m가량 떨어진 입구 쪽에 개천을 막아 만든 연못이 있고, 그 곁에 아담한 연정이 있어 정취를 더한다. 연정은 조선조 정조대 학자 정석달(鄭碩達)의 손자인 정일릉(鄭一錂)이 장수(藏修)의 목적으로 1788년(정조 12)에 건립한 정자이다. 정용준 씨 가옥 입구의 가파른 언덕에 3칸 온돌방과 대청을 둔 평면으로 구성하고 정자 아래에는 개천을 이용한 연못을 노송이 어우러져 아늑한 풍취를 자아낸다.

함계정사는 마을 입구에 남향하여 있으며, 임진왜란 때 영천 의병장인 호수 정세아의 현손인 정석달이 1702년(숙종 28) 학문을 강학하기 위해 정자를 짓고자 하였으나 재력이 부족하여 우선 소재(小齋)를 지어 안락재(安樂齋)라 했다. 그 뒤 1779(정조 3년) 손자인 일찬(一鑽)[1724~1797]이 중건하여 함계정사라 하였는데, 건물은 세 칸 규모의 누각형에,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로 온돌방을 들인 평면이며, 가구는 3량가로, 지붕은 기와를 이은 맞배집이다.

괴헌 고택은 소유자인 6대조인 정천휴(鄭川休)가 1872년(고종 9)에 건립한 살림집으로, 원래 一자형 안채와 고방채, 사랑채 등이 튼ㅁ자형으로 구성되었으나, 지금은 안채만 남아 있다.

송고헌 고택은 마을 입구에 위치하며, 송고헌 정치술(鄭致述)이 1863년에 건립한 살림집이다. 송고헌 고택 건물은 一자형 안채와 아래채, 고방채, ㄱ자형 사랑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튼ㅁ자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랑채만 기와를 이은 팔작집이고 그 외는 맞배집이다.

정경식 가옥은 1916년에 건립된 근대 한옥으로, 一자형 안채와 고방채, 아래채, 문간채가 튼ㅁ자형으로 배치되고, 고방채 앞으로 一자형 사랑채와 솟을대문을 둔 큰 규모의 살림집이었는데, 지금은 안채와 고방채, 사랑채, 솟을대문만 남아 있다. 사랑채는 기와를 이은 팔작집이고, 그 외는 맞배집이며, 사랑채에는 근대 한옥의 구조 및 세부기법이 잘 남아 있다.

정기인 가옥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一자형 안채와 아래채, 근대에 지은 ㄱ자형 사랑채와 튼ㄷ자형으로 배치된 살림집으로, 사랑채만 일식 기와를 이은 우진각집이고 그 외는 맞배집이다.

정동우 가옥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한 단 높은 지대에 안마당을 중심으로 一자형 안채와 도장채, 아래채, 사랑채가 튼ㅁ자형으로 배치된 근대 한옥으로, 사랑채의 평면 및 구조, 창호 등에서 근대 한옥의 특징을 엿 볼 수 있다.

경괴재는 선원마을 중앙에 있는 동연정에서 우측 언덕 위에 있는데, 건물은 조선 정조 때 학자인 괴헌(槐軒) 정천휴(鄭川休)를 추모하기 위해 증손인 정진돈(鄭鎭敦)과 후손들이 합심하여 1938년에 건립한 4칸 一자형 정자이다.

동연정선원마을 가운데 인공 연못 곁에 있는 정자로, 정조 때 학자인 정백휴(鄭伯休)[1781~1843]를 추모하여 후손들이 건립하였다.

송원재는 선원마을 입구에 있는 함계정사 위쪽에 있는 재실로, 숙종 때 통덕랑에 오른 정중보(鄭重簠)를 추모하여 후손들이 건립한 재실이다.

학파정은 마을 초입의 정동우 가옥 우측 편 언덕 위에 있는 정자로, 고종 때 학자이며 사상가인 정치구(鄭致龜)[1824~1901]가 은거하던 곳으로, 현 정동우 가옥정치구의 고택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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