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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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圃隱鄭夢周-朝陽閣-臨皐書院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
집필자 | 전민욱 |
출생지 | 정몽주 출생지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 울목[鳴項]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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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임고 서원 소재지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
[개설]
경상북도 영천(永川)은 고려 말의 학자이자 충신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가 태어난 유서 깊은 지역이다. 1368년(고려 공민왕 17) 당시 부사(副使)였던 이용(李容)이 정몽주와 함께 남천의 절벽 위에 지은 건물인 조양각(朝陽閣)과 일편단심 충절을 지킨 정몽주의 업적과 정신을 이어받고자 세운 임고 서원(臨皐書院)이 있는 곳이다.
[포은 정몽주 관련 이야기]
정몽주는 어머니인 변한국대부인 영천 이씨가 임신 중에 난초 화분을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렸는데, 화분은 다 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난초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 꿈을 꾸고 깜짝 놀라 깨어나 낳았기에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지었다고 한다.
정몽주가 아홉 살 되던 해에는 어머니가 물레질을 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을 때 검은 용이 뜰 가운데 배나무를 기어올라 황금빛 비늘은 번쩍이며 배를 따 먹기에 유심히 쳐다보니 용 또한 머리를 쳐들고 빙그레 웃는 모습에 깜짝 놀라 깨어 보니 너무나도 생생한 꿈이었다.
이에 뒤꼍으로 가 보니 어린 몽란이 배나무에 올라 앉아 배를 따 먹다가 어머니를 보고 빙그레 웃는 모습이 흡사 꿈속에서 본 용의 모습이었기에 이름을 몽룡(夢龍)이라 고쳤다고 한다.
정몽주가 관례(冠禮)를 치를 즈음에 아버지 정운관(鄭云瓘)이 꿈속에 신선을 만나 무릎을 꿇고서 “어디서 오신 어른이십니까?” 하고 물으니, 신선이 대답하기를, “나는 주공(周公)이다. 그대 아들 몽룡은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길 소중한 사람이니 잘 길러야 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꿈에서 깬 아버지는 곧 관례를 치를 것이니 아명을 버리고, 꿈속에서 주공을 만났다고 하여 몽주(夢周)라 고쳐 부르게 하였다.
정몽주가 태어난 곳은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 울목[鳴項]마을인데, 이 마을을 울목이라 부르는 데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첫째, 보현산에서 흘러오는 자호천(紫湖川)과 운주산(雲住山)에서 흘러오는 냇물이 합쳐지는 두물머리에서 소리가 난다고 하여 붙여졌다.
둘째, 당시 도로에서 먼 골짜기에 있어서 가만히 귀 기울여 들으면 도로를 지나는 말울음 소리는 어렴풋하게 들리나 그 방향까지는 알 수가 없어 붙여진 이름이다.[정진언, 78세, 영천시 임고면 고천리 출생, 영천시 문내동 거주]
셋째, 정몽주가 태어나자 학이 울며 날아갔다고 해서 붙여졌다.[정환수, 63세, 전 임고면장, 영천시 망정동 거주]
넷째, 정몽주가 강보에 싸였을 때, 매일같이 밤낮으로 쉬지 않고 울음을 계속하였으므로, 집안사람들은 무슨 불길한 일이 생길 징조가 아닌가 하여 매우 걱정을 하였다.
그러던 중 칠날[七日]이 되자 한 점잖은 스님이 찾아와 시주를 청하기에 아버지가, “시주는 어렵지 않습니다마는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뱃속에서 떨어진 이래로 갓난아기가 밤낮으로 울고 있으니 무슨 까닭인지 알 수가 없어 걱정이오니 한번 봐 주십시오.” 하자, 스님이 방을 보여 달라며 정몽주가 누워 있던 방에 들어와서 사방을 살펴보고 이르기를, “이것은 도련님이 우는 것이 아니고 벽에 쓰여 있는 글을 읽고 있는 것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백지(白紙)로 도배를 하면 울음을 그칠 것입니다.”고 하였다. 정몽주의 아버지는 반신반의하면서도 그 스님의 말대로 흰 종이로 도배를 하고 나니 비로소 울음을 뚝 그쳤다고 한다. 그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 출생지에 세워진 효자리비 이야기
정몽주가 태어난 우항리에는 정몽주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세운 비가 남아 있다. 『고려사』에 보면, 당시 초상이 나면 100일 만에 부모상을 벗었는데, 정몽주는 부모상에 분묘를 지키고 애도와 예절을 모두 극진히 하여 왕이 그 마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1389년(공양왕 원년)에는 마을에 ‘효자리(孝子里)’라는 글귀를 새긴 정몽주의 유허비를 세웠는데, 이 비는 원래 생가 인근에 세워졌으나,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참변을 당한 후 비석 또한 땅속에 묻히는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그러다 조선조에 들어와 1487년(성종 18) 손순효(孫舜孝)에 의해 다시 세워지게 되는데, 그 내용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아래와 같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성종(成宗) 때 손순효가 일찍이 이 도의 안찰사가 되어 순시하러 군경(郡境)을 지나던 중, 술에 취하여 말 위에서 졸다가 정신없이 포은촌(圃隱村)을 지나갔다. 꿈결에 머리털과 수염이 희고 의관이 점잖은 한 노인을 어렴풋이 보았는데, 그 노인이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포은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거처하고 있는 곳이 퇴락해서 비바람을 막을 수 없다.’ 하며 부탁하는 기색이 있었다. 순효가 놀라고 괴이쩍게 여겨, 그 지방 사정을 잘 아는 노인들에게 물어 사당 옛터를 찾아 군민들을 독려해서 다시 짓도록 하였다.
사당이 완성되자, 순효가 몸소 전(奠)을 드리고 낙성잔치를 베풀었다. 스스로 큰 잔을 기울여 술을 마시고 취한 채로 사당의 벽에 글을 쓰기를, ‘문승상(文丞相)과 충의백(忠義伯), 이 두 선생은 간담이 상조(相照)하였네. 자기의 한 몸을 잊고 인간 기강을 확립하였으니, 천만세에 크게 우러러 마지 못하네. 고금의 사람들이 오직 이익만을 좇아 분주한데, 이 두 선생은 청상(淸霜) 백설(白雪)에 송백(松柏)이 창창하듯 하였네. 이제 한 칸의 집을 지어 드리니, 그것으로써 바람을 막을 수 있으리. 공의 영혼이 편안함에 저의 마음도 편안합니다.’하였다.[「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후에 관리 정거(鄭琚)가 사당이 너무 궁벽진 곳에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당시 큰길가인 현 위치로 옮겨 세웠다.
[조양각 관련 이야기]
1. 조양각의 창건과 중건
조양각의 원래 명칭은 명원루(明遠樓)로, 1368년(고려 공민왕 17) 당시 부사였던 이용이 정몽주와 함께 보현산에서 원류한 남천의 절벽 위에 지은 건물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1482년(성종 13) 군수 신윤종(申允宗)이 동서 별실을 고쳐서, 동을 청량당(淸凉堂), 서를 쌍청당(雙淸堂)이라 명명했다.
이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되었는데, 1637년(인조 15) 군수 한덕급(韓德及)이 명원루 터에 누사(樓榭) 열다섯 칸을 중건하고 조양각이라 하였다. 1676(숙종 2)에는 군수 이만봉(李萬封)이 중수하고, 1702년(숙종 28)에 군수 권영경(權寧經)이 중창하였다.
1742년(영조 18)에는 군수 윤봉오(尹鳳五)는 세 번째로 중창한 누사(樓榭)에 ‘서세루(瑞世樓)’[현재 배면(背面)에 현판되어 있음]라 편액하고, 내문(內門)을 남덕문(覽德門), 외문(外門)을 곤구문(崑邱門)이라 하였다. 이후 1763(영조 38), 1797년(정조 21), 1810년(순조 10), 1870년(고종 7), 1886년(고종 23)과 1921년에 각각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1920년대에 이르러 일본인들이 영천 심상소학교를 지을 때 누사의 내·외문을 비롯한 건축물을 철거하여 지금과 같이 위축되고 말았다.
2. 조양루를 다녀간 명현달사
서거정(徐居正)은 “군 이름을 영천[永]이라 일컫는 것은 ‘두 물[二水]’의 뜻을 취한 것이다. 대개 두 물이 자모산에서 발원하여 두 갈래로 나뉘어 꺾여서 남쪽으로 흐르다가 군 앞에 이르러 합쳐져서 하나가 된다. 그래서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다”라고 명원루 기문(記文)에서 밝혔다. 또 명원루라는 이름은 당나라 문장가인 한퇴지(韓退之)의 시 가운데 ‘원목증쌍명(遠目增雙明)’[훤히 트인 먼 경치를 바라보니 두 눈마저 밝아오는 듯하다]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고, 이어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안동의 영호루(映湖樓), 울산의 태화루(太和樓), 양산의 쌍벽루(雙碧樓), 김해의 연자루(燕子樓)를 두루 둘러보았지만 이 누각이 그 어느 곳에도 빠지지 않는도다.” 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서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율곡(栗谷) 이이(李珥) 등 많은 명현달사(名賢達士)가 다녀가고 그들이 남긴 많은 시들이 현판에 새겨져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다.
정몽주는 중국 명나라 및 왜구 문제가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시기에 명나라에 여섯 차례, 일본에 한 차례 등 도합 일곱 차례 국교의 큰 임무를 수행하였다.
1372년(공민왕 21) 서장관(書狀官)으로 홍사범(洪師範)을 따라 경사(京師)에 가서 촉(蜀)을 평정함을 축하하고 유학생의 수용을 허락받고 돌아오는 길에 큰 풍랑을 만나 배가 전복되어 속수무책 죽음의 길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명 태조의 칙서와 외교문서가 담긴 보자기를 잃지 않기 위해 가슴에 품고 허리띠로 동여매고, 구사일생 암도(巖島)에 이르러 칠갑(漆甲)을 뜯어먹고 13일간 연명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명나라 황제가 선박을 보내어 구하고 은휼(恩恤)을 두터이 하였으니, 정몽주는 첫 외교부터 죽음을 무릅쓰고 명제(明帝)와 화친(和親)의 큰 성과를 거두었다.
1375년(우왕 원년)에 왜구의 침탈에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고려에서는 나흥유(羅興儒)를 패가대(覇家臺)에 사신으로 보내어 화친하도록 타일렀으나, 왜의 주장(主將)이 나흥유를 가두어 거의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가 겨우 살아 돌아온 사건이 있었다.
1377년(우왕 3) 정몽주는 평소 원한을 품고 있던 권신들의 천거로 사신으로 가게 됨에, 주변에서는 다 위태하다며 말렸으나, 어려워하는 빛이 조금도 없었으며, 사신으로 가서는 고금의 교린(交隣)의 이해(利害)를 극진히 설명하니 경복하여, “내 오늘 성현(聖賢) 다음가는 사람을 만났다.” 하고 그 대접이 매우 후하였다.
정몽주가 중심이 되어 만든 명원루는 임진왜란으로 불에 탔다. 그 터에 다시 누각을 세워 조양각이라 이름 지으니, 이곳은 조선통신사에게 너무나 특별한 장소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조양각은 서울에서 출발한 통신사가 도일(渡日)을 위해 부산으로 향하는 사행노정 속에 포함되어 있다. 조양각에서 피곤에 지친 역마를 갈아타고, 사행 관련 인원을 차출하며, 선원을 제외한 사행원들의 집결 장소였다. 게다가 경상 감사가 베푸는 전별연(餞別宴)에서 일본의 집권자에게 선보일 마상재(馬上才)가 시연되기도 했던 곳이다.
[임고 서원 이야기]
1 .임고 서원 창건과 부래산 설화
1550년(명종 5)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상소로 영주의 소수 서원(紹修書院)이 사액되었으니, 1553년(명종 8년) 부래산(浮來山)에 창건되는 임고 서원도 이황의 영향으로 창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선 창건 주체가 이황의 문인(門人)인 노수(盧遂)와 김응생(金應生), 정윤량(鄭允良)이 주축이 되었으며, 또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1554년 초여름에 노수가 서원에 필요한 서책을 구하고, 아울러 서원에 대한 절목(節目)을 정하기 위해 한양으로 이황에게 찾아갔다.
이황은 제자들이 학교를 세움에 크게 기뻐하며 명종에게 하사받은 『성리군서(性理群書)』 한 질을 서원에 기증을 하며 기증문을 썼을 뿐만 아니라 이황은 몸소 제문과 상향축문을 만들어 보내고, 아울러 서적이 새로이 출판되면 임고 서원 몫을 반드시 챙기고, 때로는 충고와 고언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당시로서는 귀한 음식인 유밀과(油蜜果)가 잔칫상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평소 부화함을 경계했던 이황은 1561년(명종 16) 조카 이완(李完)에게 편지를 보내 이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는 창립 초기부터 사치스럽다는 비난이 따라서는 서원이 추구하는 본질적인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우려때문이었다.
임고 서원이 처음 창건된 부래산은 야트막한 작은 언덕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어느 해 7월 붕어같이 생긴 작은 산이 운주산(雲住山) 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별안간 천지가 진동하는 벼락이 치고 소나기가 내려 산이 홍수에 떠내려 오다가 지금의 자리에 이르러 마을 아낙네가 그것을 발견하고, ‘저기 산 떠내려 온다!’라고 고함을 지르자, 산이 멈추어 섰다.”고 하여 떠내려 온 산[浮來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아무리 볼품없이 작은 산이라 할지라도 임고 서원을 창건한 중요한 곳이기에 그 이름이 아직까지 전해지는 것일 것이다.
2. 임진왜란과 임고 서원 소실 및 영정(影幀)의 피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천성이 함락되고 노략질을 일삼던 왜적에게 임고 서원도 소실되고 만다. 그러나 서원에 봉안되었던 정몽주의 영정은 이현남(李顯男)과 전복실(全福實), 최선매(崔善梅)에 의해 옮겨져 화를 면하게 된다.
정몽주의 영정이 처음으로 옮겨진 곳은 영천시 자양면의 기룡산(騎龍山) 중턱에 있는 조그마한 석굴인데, 이 석굴은 정몽주의 영정뿐만 아니라 영천향교의 위패까지 피란한 곳이기에 후세 사람들이 성혈(聖穴) 또는 성현암(聖賢巖)으로 부르고 있다.
이 석굴에서 초하루와 보름마다 분향을 올리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지라 한양 조씨의 정자인 자양면 성곡리의 계정(溪亭)[현 자계정(紫溪亭)]으로 옮겼다가, 다시 자양면 노항리 노루목[獐項]으로 옮겨지게 되고, 왜란이 끝난 후에 소실된 서원 터에 영당을 세워 봉안하였다.
1603년(선조 36)에는 현 위치인 임고면 양항리에 새로운 서원이 세워지고, 영정이 낡아 1629년 어진화사인 김식(金埴)으로 하여금 다시 그리게 하고, 구 영정은 경기도 용인의 종가(宗家)로 옮겨 모시게 되는데, 김식이 그린 영정은 보물 제1110호[현 제1110-1호]로 지정되었으며, 용인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이는 영정이 종가에서 경기도 박물관에 기증한 일괄 문서 중에 발견되어 보물 1110-2호로 지정되었다.
3. 임고 서원 성역화사업 및 숭모사업
임고 서원은 1871년(고종 8)에 국령(國令)으로 훼철되었으며, 1879년(고종 16)에 존영각을 지어 포은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광복 후인 1965년에 서원이 복원되어 위패로 봉향(奉享)하였다가 1979년에 사림이 건의하여 정부의 보조로 구강당(舊講堂)의 뒤에 묘우(廟宇)를 신축하였다.
그러나 정몽주 선생의 위업과는 달리 유덕을 받들고 정신을 기려야 할 유적은 황량한 모습으로 남아 있음을 심히 안타깝게 여긴 유림(儒林)이 모여, 1989년 임고 서원중건성역화사업추진위원회(臨皐書院重建聖域化事業推進委員會)를 결성하게 되고, 1999년 국가와 자치 단체의 도움으로 규모를 갖춘 서원을 준공하기에 이르렀다.
후학들에게 선생의 가르침을 널리 교육하여 민족의 정체성 회복에 힘쓰는 것이 미진함을 안타깝게 여긴 뜻있는 인사들이 2004년 1월 경상북도로부터 사단법인 설립 인가를 얻어 포은선생숭모사업회(圃隱先生崇慕事業會) 설립을 등기를 마쳤다.
이후 정몽주 선생 숭모사업에 박차를 가해 전국학술대회와 전국한시백일장을 개최하고, 『포은선생약전』과 『임고 서원지』, 『숭모사업회지』를 발간하여 정몽주의 사상과 업적을 선양하고 전국한글백일장과 충효강좌 및 효문화 기행을 개최하여 청소년들에게 그 정신을 길이 전승하는 데 힘써 왔다.
또한 영천시와 문화재청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포은유물관(圃隱遺物館), 충·효·예·악의 생활 체험 교육을 담당할 충효관(忠孝館)과 기념 공원 등 제반 시설들이 완비된 임고 서원 충효문화수련원을 준공하여 후진에게 포은 정몽주의 사상과 업적을 길이 잇는 사업에 앞장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