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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복을 위한 축제의 놀이, 영천 곳나무 싸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017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집필자 이원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7년연표보기 - 영천 곳나무 싸움, 복원하여 영천문화예술제에서 시연

[개설]

영천 곳나무 싸움은 줄당기기에 이어서 벌어지는 대동 놀이로서 영천 고을의 읍치였던 영천읍과 그 주변 지역에서 정월 대보름 명절에 벌어진 영천 특유의 대동 놀이로, 영천 사람들은 줄당기기의 승부보다는 곳나무 싸움에 보다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영천 곳나무 싸움은, 줄당기기의 승부가 결정되면 미리 줄머리에 자리하고 있던 양편의 용맹한 싸움꾼들은 암줄과 숫줄을 결합하는 데 사용한 곳나무를 쟁취하기 위해서 격돌하는 놀이로서, 어느 한쪽이 곳나무를 차지해 정해진 기간 동안 지켜 내면 이기는, 초복을 위한 축제 놀이다.

영천의 읍치는 크게 내동(內東)과 내서(內西)로 나뉘는데, 당시 내동 지역은 문외동·문내동·야사동·망정동·조교동 등 다섯 마을이 속하였고, 내서 지역은 성내동·창구동·교촌동·금로동·화룡동 등 다섯 마을이 속하였다.

곳나무 싸움의 기반이 되는 줄당기기의 편 구성은 이와 같은 읍치의 구분을 기준으로 삼았는데. 내동은 동부 편의 중심을 이루었고, 내서는 서부편의 중심을 이루었다. 영천 고을의 서부 지역에 속하는 마을들은 모두 서부가 되고, 동부 편에 속하는 마을들은 동부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매년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큰줄을 당길 때는 어김없이 그렇게 되어서 읍치의 중심 마을들과 읍외의 주변 마을들 사이에서 물심양면에 걸쳐 긴밀한 협조가 이루어졌다. 읍에서 수십여 리 떨어진 마을마다 큰 줄을 만드는 데 쓸 가닥줄을 엮어 져서 나른 일은 이러한 사정을 잘 보여 준다. 이들은 줄을 만드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줄당기기와 영천 곳나무 싸움에도 지역 간의 연대를 과시하였다.

광주 광산의 ‘고싸움 놀이’가 줄당기기의 대표적인 앞 놀이라면, 영천의 곳나무 싸움은 줄당기기의 대표적인 뒷놀이다. 영천 사람들은 줄당기기의 승부보다는 곳나무 싸움에 보다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특징이다. 줄당기기의 승부가 결정되면 양편의 싸움꾼들은 암줄과 숫줄을 결합하는 데 사용한 곳나무[지역마다 곳방망이·고방망이·고방맹이·곳목·골매기 등으로 불려짐]를 쟁취하기 위해서 격돌한다. 그리하여 뺏고 뺏기고 숨기고 찾는 싸움이, 길게는 2월 초하루까지 계속되어 그때까지 곳나무를 보관하고 있던 편이 승리하게 된다.

영천 곳나무 싸움은 줄당기기에 이어서 행해지고 줄당기기의 부속품인 곳나무를 활용하는 것으로 보아 줄당기기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한 놀이지만, 사람들이 줄당기기보다 흥미로운 놀이로 인식하였고, 양식적인 독자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이제까지 알려진 줄당기기의 뒷놀이인 전라남도 순천 해룡면의 코줄다리기나 경상북도 의성 사촌 박사놀이와 구별되는 면모를 지니고 있다. 또한 직접적인 신체의 격돌, 뺏기와 빼앗기, 도망과 추격, 숨기기와 찾기 등 극적 반전의 요소들을 다양하게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은 곳나무 싸움을 다른 대동놀이와 구별시켜 주는 두드러진 자질들이라고 하겠다.

영천 곳나무 싸움은 1930년대까지 전승되다가 일제 탄압으로 전승이 중단되었다. 그 뒤 복원을 위한 준비 작업이 진행된 끝에 1987년 복원이 이루어져 그 해 열린 영천문화예술제에서 시연되었고 1996년에는 제1회 영천시민축제에 시연되었으며, 1999년 이후 영천시에서 영천시 청년연합회와 영천전자공업고등학교를 보존 단체로 지정하여 전승해 왔다.

[내용]

영천 곳나무 싸움은 아이들의 ‘막대 싸움’에서 비롯된다. 정초가 되면 내동과 내서의 아이들은 편을 갈라 ‘애기줄당기기’를 시작한다. ‘애기줄’은 주로 십대 초반의 아이들이 모여서 만든 소규모의 줄이고, 막대는 이 줄을 결합시키는 데 사용한 나무로서 길이가 50~60cm, 지름이 10cm 정도이다.

일진일퇴의 각축 끝에 줄당기기의 승부가 결정되면 막대싸움을 시작하는데, 양편의 아이들은 줄머리로 몰려들어 막대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다툼을 벌이고, 막대를 먼저 차지한 쪽은 막대를 숨기기 위해서 달아나기 시작한다. 상대편에서는 추격전을 전개하고 반대편에서는 추격을 저지하기 위하여 접전을 펼치는데, 약속한 시간까지 막대를 갖고 있는 편이 승리하게 된다.

막대싸움은 한 번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정초에 여러 차례 이루어진다. 그러는 동안 참여하는 아이들의 연령도 높아지고 숫자도 많아지며 줄의 규모와 막대의 크기도 커진다. 양편의 어른들은 청소년들의 막대싸움을 응원하고 격려하면서 자신들이 주도한 큰줄당기기와 곳나무 싸움을 의식하게 되고, 마침내 대보름이 가까워 오면 양편의 대표들이 만나서 대전을 펼칠 날을 정하고 준비에 들어간다.

곳나무 싸움의 사전 준비로 먼저 줄만들기가 시작되는데, 영천읍의 줄은 전형적인 쌍줄로서 큰 줄의 길이가 200여m에 이르렀으며, 굵기는 장정이 걸터앉아도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였다. 읍내의 각 마을의 협조를 받아 줄이 다 만들어지면 줄을 잘 보관하는데, 이때 여성과 상대편의 접근은 엄하게 차단된다.

어느 지역에서나 그러하듯, 줄을 만드는 과정은 직접 농업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이들이 주도한다. 이들은 굿패[풍물패]를 앞세워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짚을 모은다. 이때 지주 부농들은 보다 많은 짚을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놀이의 과정에 소요될 경비도 상당량 내놓는다. 이 가운데 특히 활달하고 재력 있는 이가 각 편의 대장으로 추대되어 줄당기기는 물론 곳나무 싸움의 전 과정을 영도하게 된다. 사람들은 축제 기간 동안 대장에게 실제 사회의 지위와는 다른 축제적 권위를 부여하며 그의 말에 복종한다.

정월 열엿새가 되면 각 편에서는 만들어진 줄을 울러 메고 주로 40~50대의 대장을 태워 마을 곳곳을 돌면서 길놀이를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양편 줄이 마주치면 고[줄머리]를 마주 대고 기세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줄당기기가 벌어지는 곳은 영천 고을의 중심을 흐르는 금호강(琴湖江)에 놓여 있는 영천교 아래의 넓은 백사장이나 다리 건너 큰길이었다.

각축 끝에 암줄과 수줄이 결합되면 줄당기기가 시작된다. 구름같이 밀려든 남녀노소들은 이 세상의 모든 구별과 차별이 사라지고 오직 줄과 당기기만이 존재하는 놀이판의 한 중심이 되어서 줄당기기에 몰입한다. 미리 정해진 금을 지나 어느 편의 줄이 끌려가서 줄당기기의 승부가 결정되면 곳나무 싸움이 시작된다. 고 주위에 배치되어 있던 각 패의 용맹한 싸움꾼들은 서로 곳나무를 차지하기 위하여 격렬한 싸움을 전개한다. 곳나무는 암줄과 수줄을 결합시키는 나무로서 크기는 길이가 1m 남짓이고, 직경은 15cm 정도였다. 곳나무는 해마다 따로 만들지 않고 계속 사용하여야 하고, 줄당기기는 물론 곳나무 싸움에도 사용되기 때문에 주로 목질이 단단한 참나무나 대추나무로 만들었다.

격돌 끝에 어느 편이 먼저 곳나무를 쟁취하면 자기편 지역으로 힘차게 던지고 이것을 주워 든 사람들은 다시 앞서가는 동료들을 향해 멀리 던지는 과정을 거듭하면서 자기편 지역을 향해서 전진한다. 수백 명 동료들의 호위 아래 눈밭이나 얼음판을 가리지 않고 질주는 계속된다. 상대 편 역시 수백 명의 전사들이 맹렬한 추격전을 펼친다. 이 과정에서 육박전이 불가피하게 벌어지는데, 곳나무를 차지한 쪽은 숨길 곳을 물색하고 상대편이 그것을 알아내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방어하고, 상대편에서는 숨길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서 접근전을 펼친다.

이런 과정이 워낙 격렬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에, 일제는 줄당기기는 허락하면서도 곳나무 싸움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곳나무 싸움은 계속되었는데, 어느 해는 일제 순사가 곳나무를 탈취하여 얼음이 언 강을 건너 달아나는 싸움꾼들을 잡으려고 맹렬하게 추격하였지만, 끝내 잡지 못하였다고 한다. 곳나무 싸움의 공간은 영천 고을 전체라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았으며, 읍을 중심으로 30리 안팎이 모두 놀이의 공간이 되었다. 논밭과 강산을 가리지 않았고, 여염집의 안팎을 가리지 않았다. 곳나무 싸움군이 존재하는 곳은 어디나 놀이 공간이 되었다. 영천읍 내에서 시작된 싸움은 점차 그 반경을 넓혀서 동부의 경우 단포와 고경까지 진출하였고, 서부는 하양까지 진출하였으니 이들 지역이 모두 읍내 30리 정도 떨어진 지역이었다.

[전래 풍속]

영천 곳나무 싸움에서 빼앗고 빼앗기고, 숨기고 찾는 과정을 반복되면서 재미있는 일화들이 전해오고 있다.

-하양면[현 경산시 하양읍] 앞의 시천강 강변 모래밭에 곳나무를 묻어 두었다가 상대편에게 발각되어 다시 북안면 명주리의 어느 여염집 장롱 속에 감추어 두었다.

-망정동 우로지 못 얼음 구멍에 넣어 두었다가 나중에 못의 얼음을 모두 깨뜨린 뒤에야 곳나무를 찾았다.

-화장실에 넣어 두었다가 2월 초하루에 다시 건져 내어 승리하였다.

-곳나무를 잡고 도망치는데 상대편이 추격하여 곧 잡힐 지경에 이르자 얼떨결에 지나가는 아낙네의 치마를 들춰 그 밑에 감추었다.

-출산한 산모의 방에 곳나무를 감추어 승리한 적이 있다.

이처럼 정해진 시간까지 곳나무를 숨긴 쪽이 이기기 때문에, 숨기기는 승패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숨기기를 중심으로 곳나무 싸움의 구도를 살펴보면, 곳나무를 뺏은 편은 곳나무를 숨기고, 상대편은 그 곳나무를 찾아내서 다시 숨긴다. 이와 같은 반복적 구도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숨김에 있다. 반복된 상황에서 숨김이 멈출 때가 되면 비로소 승부는 결정된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숨기기에 관한 일화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곳나무를 확보한 편에서는 상대편이 쉽게 찾아낼 수 없는 장소를 찾기 위해서 골몰하고, 반대편에서는 이와 같은 상대편의 숨기기를 저지하기 위해서 접근전을 펼치는 한편, 이미 숨겨 버렸을 경우 곳곳을 뒤지고 다녔다. 이 과정에서 일상적 시공간에서는 허용되지 않을 침투와 은닉, 그리고 수색이 허용되었다. 달리기에 능하고 강단이 있는 20~30대의 청장년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모래밭이나 여염집의 장롱, 저수지의 얼음판 밑 등에서,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백 명에 달하는 싸움꾼들이 별별 공간을 찾아 숨기고 찾아 나서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처럼 곳나무 싸움의 놀이 공간은 광활하고, 놀이 시간 역시 여유롭게 잡게 된다. 대보름 명절에 시작한 놀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개되어 보통 이월 초하루가 되어서야 최종 승부가 결정되었다. 이때까지 곳나무를 보관하고 있던 편이 이기게 된다. 이긴 편에서는 굿패[풍물패]들이 2~3일 동안 주로 읍내를 돌며 지신을 밟아 주고 걸립(乞粒)을 하여, 그야말로 질펀한 축제 한마당을 펼치게 된다. 여느 대동놀이, 특히 줄당기기 형태의 놀이와 마찬가지로 곳나무 싸움에서도 이긴 편은 길하고 또한 풍년이 든다든지, 곳나무를 보관하거나 곳줄을 가지면 득남을 한다는 기풍적인 속신(俗信)을 갖고 있었다.

[전승과 보존 노력]

일반적인 줄당기기와는 차별되는, 독특한 영천의 곳나무 싸움의 생성 연원은 지금까지 연구 과제로 남아 있다.

멀리는 1592년(선조 25) 파죽지세의 임진왜란 당시 왜에 의해 빼앗긴 영천 읍성을 되찾기 위해 마치 곳나무 싸움의 대장 역할과 흡사한 향내 유림 양반들이 주축으로 한 사발통문으로 창의(倡義)한 3천여 의병들이 창의정용군으로 결집하여 임진왜란사상 최초로 복성(復城)을 한 승전과의 역사성을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아직도 영남 3대 시장으로서 명분을 충분히 살리고 있듯이, 일찍이 교통의 요충지로서 내왕하는 유동 인구가 많았지만 동서남북으로 운주산(雲柱山)·팔공산(八空山)·사룡산(四龍山) 등 준령으로 둘러싸여 대구에 못지않는 분지를 이룬 고립된 지형에서 자연 발생한 소통형 놀이는 아닌지, 일반적인 민속놀이들이 저마다 유래나 연원을 갖고 있듯이 이 놀이에 대한 스토리텔링 연구는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현재 영천 지방에는 완전한 형태의 곳나무 싸움놀이를 보존하는 지역은 없다는 것이 지역 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물론 필자가 1982년부터 채록한 자료를 기초로 고증하여 지난 1986년 영천문화예술제 때 한번 시행한 적은 있었지만, 시민들에게는 크게 호응을 얻지 못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규모나 홍보 등이 미비한 탓도 있었지만, 이를 시민축제화하지 못한 행사를 위한 행사에 그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본다.

그러나 영천 곳나무 싸움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고 있음을 감안하여 다시금 시도해 볼 만한 향토 축제로서의 ‘영천 곳나무 싸움놀이’를 심층 연구하기 위해 향내에서 유사한 놀이를 찾던 중 1995년 고경면 상덕리에서 약소한 규모이지만 이 놀이의 전희적(前戱的) 유형인 줄다리기가 매년 정월 보름에 실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찾아 낼 수 있었다.

다만 1910년 경술국치 전까지만 해도 읍내 고을, 더러는 읍민 전체의 열기를 담아 성행했던 본래의 의전적(擬戰的)인 싸움놀이의 목적이나 규모는 아니었지만, 당제(堂祭)를 대신하여 행하게 되었다는 이 고경면 상덕리 줄다리기를 찾게 된 것이다. 매년 정월보름을 앞두고 윗마을과 아랫마을에서 염출한 볏짚으로 암수 각각 곳줄을 만들어 마을회관 앞에서 벌이는 이 줄다리기는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제관(祭官)의 제례 후에 시작하게 된다. 당시 90여 호의 주민들로서는 상당히 힘이 들었음직한 줄을 남녀노소 모두가 두 편에서 서로 당기는데, 옛날처럼 진 편에서 흔히 부담하는 두레나 금전적인 부담을 약조하는 일은 없어졌다고 하나 마을의 흉액을 없애고 동민의 대동 의식을 드높이는 데 목적을 둔 이 마을의 놀이는 비교적 줄다리기의 전형을 보존하고 있다 할 수 있다. 특히 득남을 위해 새끼줄을 끊어 방에 둔다거나 지붕에 던져 액운을 쫓는 것, 퇴비로 쓰기 위해 사과밭에 놓은 것 등은 바로 줄다리기의 기풍적(祈豊的)인 면모를 잘 나타내고 있었다.

1930~1940년대 일제의 문화정책으로 말살된 우리 민족문화 중 지방의 민속놀이, 특히 영천 곳나무 싸움은 대동놀이로서 가장 먼저 단절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1986년부터 찾게 된 이 놀이가 지난 2011년 2월 영천 곳나무 싸움보존회가 무형문화재 등록을 위해 세미나를 개최함으로써 지역의 전통문화로 보존하자는 열기가 모이게 되었다. 그 동안 영천시에서 이 놀이의 원형 복원을 위해 노력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86년 영천문화원에서 영천향토사연구회와 공동 재현[대구MBC 방영]

-1996년 제1회 영천시민축제시 재현[영천향토사연구회영천전자고등학교 참여]

-1998년 제36회 경상북도민체육대회[영천] 때 식전공개행사 시연[영천시청년연합회]

-2001년 제42회 한국민속예술축제[영주시] 출전 : 공로상 수상[영천시청년연합회]

-2002년 영천 곳나무 싸움 보존위원회 발족. 이후 영천시청년연합회에서 1999년부터 자체 체육대회 때 매년 시연

-2005년 제12회 전국청소년민속예술제[영천전자고등학교] 금상 수상

-2011년 1월 『영천 곳나무 싸움』[한양명 저] 발간[영천시, 안동대학교]

-2011년 2월 영천 곳나무 싸움 세미나 개최

영천시로부터 무형문화재 상정을 위해 연구를 위탁받은 안동대학교 한양명 교수는, “줄당기기는 한반도의 중남부 지역에 널리 분포했던 축제의 놀이였지만 줄당기기의 도구 가운데 하나인 곳나무를 이용한 놀이를 전승했던 지역은 영천이 유일하다. 왜 이 지역에서 유독 곳나무 싸움을 전승했는지 그 까닭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지역의 주민들이, 줄당기기를 전승해 온 다른 지역의 놀이집단과 달리 창조적 놀이정신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비교적 놀이의 과정이 단조로운 줄당기기의 한계를 넘어서는 보다 신명나고 역동적인 놀이로서 곳나무 싸움을 만들어 냈고, 이 놀이를 본놀이인 줄당기기보다 더 중요한 놀이로 인식해 왔다. 이런 맥락에서 영천 곳나무 싸움은 일반적으로 ‘당기기형’과 ‘밀기형’으로 구분되는 줄당기기놀이의 보편적인 유형과는 달리 ‘밀고 당기기형’에 속하는 독특한 놀이의 창조 또는 놀이의 진화 과정을 보여 주는 희귀한 사례로서 놀이사적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라며, 영천시와 이 사업을 맡은 영천시청년연합회 등의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로 영천 곳나무 싸움의 무형문화재 등록을 거들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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