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022
한자 敎育
영어공식명칭 Education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신라,고려/고려,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임삼조

[정의]

삼국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경상북도 영덕 지역 교육의 역사와 현황.

[신라시대]

신라시대의 대표적 교육은 바로 화랑 교육이다. 경상북도 영덕 지역에는 화랑 교육이 이루어진 유적이 남아 있다. 마상궁술(馬上弓術)을 하던 대표적인 곳은 영덕군 영덕읍 구미리, 영덕군 지품면 삼화리 건너 야성(野城)이다. 영덕군 강구면 삼사리의 옛 지명인 삼사랑 역시 신라 화랑과 연관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고려시대 지방 교육의 중심은 향교였다. 인종대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집권 체제를 확립하고 백성을 교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주와 현에 향교를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교육하기 시작하였다. 영덕 지역의 최초 관학 교육기관은 영해향교이다. 1346년(충목왕 2) 장서기(掌書記)·이천년(李天年)이 향중과 협의하여 영해향교의 대성전(大成殿)·동무(東廡)·서무(西廡)가 창건되었다.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인 가정(稼亭) 이곡(李穀)[1298~1351]이 1346년에 쓴 「영해부신작소학기(寧海府新作小學記)」에는 영해향교에서 과거 공부를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유학을 통한 향촌 교화와 지방 교육을 확산하기 위해 태조대부터 군현마다 향교를 세우게 하였다. 향교는 수령, 교관, 재지사족(在地士族)[조선 시대에 향촌 사회에서 유교적 소양을 갖춘 지식 계층을 이르던 말] 등이 설립, 운영하였으며, 1403년(태종 3) 영덕향교가 창건되었다. 영해향교영덕향교가 조선시대 영덕 지역 관학 교육을 담당하였다. 한편, 서원은 조선 후기부터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영해부에서는 1608년(선조 41) 우탁을 배향하는 단산서원(丹山書院), 1665년(현종 6) 박의장·박홍장을 배향하는 구봉서원(九峰書院), 1812년(순조 12) 백문보(白文寶)·백현룡(白見龍)을 배향하는 운산서원(雲山書院), 영덕현에서는 1568년(선조 1) 이언적과 이황을 배향하는 남강서원(南江書院), 1628년(인조 6) 송시열을 배향하는 신안서원(新安書院) 등 9개 서원이 세워졌다. 이 밖에 물소와서당(勿小窩書堂), 1862년(철종 13) 덕곡서당(德谷書堂), 1886년 도천서당(道川書堂) 등이 설립되어 향촌 교육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개항기 근대 교육이 확산되고 1908년 「사립학교령」, 1911년 「사립학교규칙」, 1918년 「서당규칙」 등이 제정되면서 향교 교육은 쇠퇴하였다.

조선시대 관학 및 사학 교육 기관의 융성은 영덕 지역의 많은 인재 육성으로 연결되었다. 태조 원년부터 1894년(고종 31)까지 영해도호부영덕현에서 많은 과거 합격자[사마시 87명, 문과 45명]를 배출하였다.

[개항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다. 애국계몽운동은 실력과 힘을 길러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국권회복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신교육구국운동이었다. 경상북도 지역에서도 대구광문사·대동광문회·대구광학회·달성친목회·교남교육회 등과 같은 애국계몽단체가 생겨나 신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06년 3월 「흥학조칙(興學詔勅)」이 만들어지자 경상북도관찰사 신태휴(申泰休)는 「흥학훈령(興學訓令)」을 발표해 신교육 사조를 보급하고자 근대 학교를 경상북도 지역에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영덕 지역에서도 신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학교 설립 운동이 일어났다.

첫째,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는 1908년 3월 14일 서울 보광학교에서 발기 대회를 열고 설립되었다. 교남교육회는 교육 진흥을 표방했다. 서울에 사범학교를 세워 교원을 양성하고, 지회는 각 지역에 학교를 세워 영남 지방의 교육을 진흥하고자 했다. 또한, 잡지(『교남교육회잡지』), 서적 등을 간행해 교육 의식을 높이고, 교과서를 보급해 양질의 교육을 보급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영남 지역의 전현직 관료, 유생, 신교육을 받은 학생, 일본 유학생 출신들이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때 영해 지역에서도 권영조(權寧祚)가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둘째, 학교 설립 운동이다. 영덕 지역에서는 동명학원(東明學院), 융덕학원(隆德學院), 협창학교, 영신학교(盈新學校) 등이 사립 교육기관으로 설립되어 근대 교육과 민족 교육을 시행하였다.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일본의 교육 정책 목표는 우리나라 사람을 ‘충량한 제국신민’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또한, 일본은 네 차례에 걸쳐 「조선교육령」을 제정, 공포하여 우리나라 사람을 일본의 식민 통치에 순응하는 도구로 길러내고자 하였다. 일제는 공립학교를 세워서 식민교육을 시행하고 강화하였다. 한편, 일본은 1908년 「사립학교령」, 1911년 「사립학교규칙」, 1918년 「서당규칙」 등을 제정, 공포해 학교 설립 및 운영 주체, 학교 운영 방법, 교원 임용 등 교육 전반에 엄격한 기준을 마련해 우리나라 사람이 설립한 학교를 폐교하거나 설립을 인가하지 않는 방법으로 우리나라 사람의 민족교육을 약화, 말살하였다. 이런 일본의 교육 정책과 제도는 영덕의 교육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일본의 식민지 교육 정책의 목표와 세부 정책이 잘 드러나는 학교 설립과 학제에서 그런 경향이 크다.

일제강점기 영덕 지역에서 읍면 소재지와 중심 리(里)에는 초등교육기관이 세워져, 초등 교육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1910년에는 영해, 1911년 영덕, 1922년 남정, 1928년 병곡, 1931년 지품, 1932년 축산, 1934년 달산, 1935년 강구와 창수에 보통학교가 개교하면서 면별 초등교육기관이 모두 세워졌다. 1945년 광복 직전 영덕 지역에는 보통학교[1943년 이후 국민학교]와 간이학교를 포함해 초등교육기관 17개교가 설립되었다. 한편, 중등교육기관 1개교만 있었을 뿐이다. 바로 1936년 영덕공립농업실수학교가 1년제로 개교하면서 영덕 지역에서 최초로 실업 교육이 시행되었다.

[현대]

1. 1940년대 중후반[1945~1949]

경상북도 영덕 지역의 초등교육기관이 본격적으로 확산된 시기는 1945년 광복 이후부터이다. 초등교육기관 6개교[분교장 1개교 포함], 중등학교 1개교가 신설되었다. 중학교는 1946년 영덕공립초급중학교가 신설되고, 1948년 영덕공립농업중학교[구 영덕공립농업실수학교]가 6년제로 승인되었다. 초등교육기관의 기하급수적인 확대에 비해 중학교는 2개교, 고등학교는 1개교밖에 없었기 때문에 만성적인 입학난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2. 1950년대

초등교육기관은 8개교[분교장 2개교 포함], 중학교는 3개교[영해중학교, 강구중학교, 병곡중학교], 고등학교는 1개교[영해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1950년대에는 국민학교-중학교-고등학교라는 기본적인 학제를 받을 수 있는 교육기관이 본격적으로 설립되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주로 영덕 지역 내에서도 전통적으로 인구가 밀집되고 정치·경제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외곽 지역에 사는 학생들은 중등교육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1951년 이후 면마다 중등과정의 고등공민학교가 설립·운영되면서 교육 기회가 제공되었지만, 교육 불평등은 해소되지 않았다.

3. 1960년대

초등교육기관은 12개교[분교장 9개교], 중학교는 3개교[영해여자중학교, 영덕여자중학교, 남정중학교], 고등학교는 2개교[영해여자상업고등학교, 강구상업고등학교]가 신설되었다. 학부모의 교육열이 더 높아짐에 따라 취학 아동 수가 많아지고, 1959년 농촌 지역의 초등교육이 의무교육이 되면서 영덕 전역에 초등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특히, 1960년대부터 산간벽지에는 주로 분교장을 세워 학령아동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였다. 영덕 지역에서 여성들에게 중등교육의 기회가 확대된 시기가 바로 1960년대부터이다. 그렇지만 여학생은 인문계 고등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주로 상업계 고등학교만 입학할 수 있었다.

4. 1970~1980년대

초등교육기관은 3개교[분교장 3개교], 중학교 3개교[지품중학교, 축산중학교, 창수중학교, 달산중학교], 고등학교는 1개교[(사립)영덕여자고등학교]가 신설되었다. 「중학교 의무교육 실시에 관한 규정」·「초중등교육법」·「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이 시행되면서 전국적으로 중등교육 기회가 확대된 시기가 1970년대이다. 영덕 지역 역시 군내 11개 면에 모두 중학교가 설립되면서 중등교육 기회가 커졌다. 20여 년간 영덕 지역의 교육은 양적, 질적 성장이 이뤄진 시기이다. 적어도 면 단위로 초등교육과 중학교육을 받고, 영덕군 내 영덕읍·영해면·강구면 등에 고등학교가 설립되면서 영덕군 내에서 초등 및 중등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76년은 초등교육기관 33개교, 중학교 12개교, 고등학교 5개교로 영덕군 내 최다 학교가 있었던 시기이다. 한편, 1970년대 이후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인구가 도시로 유출되거나, 산간벽지 인구가 영덕 내 영덕·영해·강구 등 중심지로 이동하면서 초등교육기관이 분교장으로 격하되거나 폐교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변화는 아직 초등교육기관에 한정되어 있었다. 한편, 1980년대 영덕 지역에는 인문계 고등학교는 영해고등학교, 영덕고등학교, 영덕여자고등학교등 3개교 밖에 없었다. 결국 중학생들은 대학 교육을 받고자 포항·대구 등 대도시로 전학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6. 1990~2020년대

1990년대부터는 초등교육기관부터 고등학교까지 본격적으로 폐교되었다. 2021년 9월 기준 영덕 지역에는 유치원 11개교[공립 10, 사립 1], 초등학교 11개교[공립 9, 공립분교 2], 중학교 8개교[공립 7, 사립 1], 고등학교 4개교[공립 3, 사립 1]가 있다.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동함으로써 인구 및 출생아 감소로 인한 취학 아동의 부족, 중등교육기관 입학을 위한 도시 이주로 인한 학생 부족 등으로 인해 폐교가 가속화되었다.

[참고문헌]
  • 『경북독립운동사』 2(경상북도, 2012)
  • 『영덕교육사』 (경상북도영덕교육지원청, 2020)
  • 경상북도교육청(http://www.gbe.kr)
  • 경상북도영덕교육지원청(http://www.gbe.kr)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s://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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