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376
한자 六二五戰爭
영어공식명칭 Korean Conflict
이칭/별칭 한국전쟁,6.25사변,6.25동란,6.25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용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6월 25일연표보기 - 6.25전쟁, 북한군의 기습 남침
종결 시기/일시 1953년 7월 27일연표보기 - 6.25전쟁 휴전
성격 전쟁

[정의]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경상북도 영덕 지역을 포함한 대한민국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개설]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었고, 1953년 7월 27일에 휴전 협정으로 종결되었다. 전쟁 기간 경상북도 영덕 지역에서 치러진 주요 전투는 지품 삼화동전투, 축산 도곡지구전투, 장사상륙작전, 해병대 영덕지구전투 등이 있다.

[역사적 배경]

1945년 8월 15일에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이하였으나,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이 갈려 이념적으로 대립하였다. 결국, 1948년에 체제를 달리하는 두 개 정부가 한반도에 세워졌다. 두 개의 정부가 세워진 뒤 남쪽의 미군과 북쪽의 소련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였다. 1950년 1월 12일에는 미국이 자신들의 극동 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하였다. 미국의 행동을 지켜본 소련은 4월에 북한의 전쟁 계획을 승인하였고, 중국은 북한과 동맹조약을 맺어 군사 지원을 해 주었다.

[경과]

6.25전쟁은 대략 4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단계는 북한군의 남침이 개시된 1950년 6월 25일부터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개시 이전까지로서, 북한군의 공세 단계이다. 2단계는 유엔군이 반격하여 10월 20일 평양을 탈환하고, 압록강 변까지 도달한 10월 26일까지로서, 유엔군의 공세 단계이다. 3단계는 1950년 11월부터 1951년 7월 휴전 회담을 개시하기 전까지로서, 중국인민지원군이 개입함으로써 전쟁이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는 단계이다. 4단계는 1951년 7월 10일부터 휴전 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 27일까지로서, 휴전 단계이다.

영덕 지역에서는 전쟁의 1단계 기간에 지품 삼화동전투, 축산 도곡지구전투, 장사상륙작전 등이 벌어졌다. 그리고 3단계 기간에 해병대의 영덕지구전투가 벌어졌다. 지품 삼화동전투는 1950년 7월 15일부터 16일에 걸쳐 일어났다. 전투가 일어나기 전부터 지역에는 북한군 유격부대인 제766부대가 이미 들어와 있었다. 북한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국군 제3사단 23연대장은 7월 15일에 박관영 상사 외 35명을 선발하여 특공대를 만들었다. 7월 15일 특공대는 주간에 삼화리 일대를 수색한 뒤 야간에 오천리 마을 뒤 오솔길 양쪽에 매복하여 오천리 마을을 지나가는 북한군 유격대를 섬멸하였다. 그리고 바로 약 4km 동쪽의 화림산 좌단 일대에 새로이 매복하여 화림산에서 또 한 번 북한군 유격대를 섬멸하였다. 축산 도곡지구전투는 7월 28일과 29일에 벌어졌다. 전투 이전에 국군 제3사단 22연대는 빼앗겼던 181고지[영덕 전방에 위치]를 되찾았다. 하지만 북한군 전차로 인한 피해가 극심하였다. 따라서 연대장은 적의 전차를 파괴하기 위하여 이명수 상사 외 9명을 선발하여 특공대[3개조]를 조직하였다. 마침내 특공대는 7월 28일 오후 9시 10분경에 북한군 전차 3대를 파괴하였다. 하지만 철수하던 중 상곡재 부근 138고지 동쪽에서 북한군과 교전 끝에 부하 3명을 잃었다. 다음 날인 7월 29일에 이명수 상사는 138고지 탈환작전에 참가하였다. 탈환작전에서 이명수 상사는 전날 잃었던 부하 3명을 구출하여 귀환하였다.

한편, 8월과 9월 초의 전황은 위태로웠다. 영덕 지역의 국군 제3사단은 8월 17일에 독석리에서 해상 철수하였다. 국군의 철수로 영덕 지역은 북한군의 점령 지역이 되었다. 북한군의 점령 지역이 된 영덕을 타개하기 위하여 9월 15일에 학도병[772명]들은 북한군의 후방인 영덕 장사리 해안에 상륙하였다. 그리고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후방을 교란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북한군의 후방을 교란하는 과정에서 139명이 전사하였고 92명이 부상당하였다. 결과적으로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는 아군에게 유리하게 되어 경상북도 북부 지역은 9월 27일~9월 28일에 국군 제8사단에 의해 수복되었다. 경상북도 북부 지역이 수복되자 퇴로가 차단된 인민군 약 1,700여 명은 소백산맥과 태백산맥 일대로 들어가 공비가 되었다. 국군은 11월 20일에 제9사단 제30연대가 경상북도 영주·상주·문경 지구에 투입되어 공비 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 공비 토벌 작전 전개에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있었다. 중공군의 공세로 유엔군은 밀려 1951년 1월 4일에 서울을 다시 내주고 그곳에서 60㎞ 남쪽의 경기도 오산과 강원도 삼척을 잇는 선까지 후퇴하였다. 경상북도 영덕 지역에서는 1951년 1월 29일부터 2월 23일까지 해병대의 영덕지구전투가 벌어졌다. 한국군 해병 제1연대는 지역에 준동하는 공비들과 25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8명을 사살하고, 공비들의 근거지를 완전히 제거하였다. 한국군이 공비들의 근거지를 제거함으로써 영덕 지역의 치안을 완전히 확보하였다.

[결과]

6.25전쟁 기간 중 1951년 7월 10일에 휴전 회담이 처음 열리고, 1953년 7월 27일에 휴전이 될 때까지 진지전이 벌어졌다. 진지전이 벌어지는 동안 영덕 지역을 포함한 소백산맥과 태백산맥 일대에서는 인민군 및 빨치산(Partizan)[6.25 전쟁 전후에 각지에서 활동했던 공산 게릴라]과 국군 간에 전투가 벌어졌다.

[의의와 평가]

6.25전쟁 기간 중 경상북도 영덕 지역에서는 다양한 적이 준동하였다. 즉, 북한군의 정규전 부대[제5사단], 비정규전 부대[766부대, 빨치산]들이다. 북한군에 맞선 국군 중에는 특이한 부대가 있었다. 급하게 모집한, 정식 군인도 아닌, 군번도 없는, 나이도 어린, 교육 훈련도 부족한, 전투 경험이 없는 바로 학도병들의 부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도병들이 상륙작전을 하였다. 당연히 피해가 극심하였다. 하지만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평화와 통일 문제는 현재 진행형이며, 아직도 역사적 과제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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