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5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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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英陽南氏 |
영어공식명칭 | Yeongyang-Nam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창기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395년 - 남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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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477년 - 남수 사망 |
본관 | 영양 -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
입향지 | 입향지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
세거|집성지 | 집성촌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영해면 원구리|괴시리|축산면 칠성리|병곡면 거무역리|각리리 |
묘소|세장지 | 남수 묘소 -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칠성리 화전[꽃밭] |
성씨 시조 | 남민(南敏) |
입향 시조 | 남수(南須) |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에서 남민을 시조로 하고 남수를 입향조로 하는 세거성씨.
[개설]
영양남씨(英陽南氏)는 남민(南敏)[?~?]을 시조로 하고 남수(南須)[1395~1477]를 입향조로 하는 성씨이다.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영해면 원구리·괴시리, 축산면 칠성리, 병곡면 각리리·거무역리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연원]
영양남씨는 신라 경덕왕 때 당나라 사신으로 일본에 갔다가 귀환 중 영덕군 축산항에 표착한 남민(南敏)을 원시조로 한다. 또한 고려 말 중대광 도첨의찬성사(重大匡都僉議贊成事)를 지내고 영양군(英陽君)으로 봉해진 남홍보(南洪輔)를 중시조로 삼고 있다.
남민의 원래 이름은 김충(金忠)인데 표착 후 신라에 정착하기를 청하니 경덕왕이 남씨를 사성하고 이름을 민(敏)으로 개명하게 하였으며 영의(英毅)라는 시호와 고은현(古隱縣)[현 영양군]을 식읍으로 내렸다. 남민 이후 500여 년간 자세한 세계를 알지 못하다가 고려 충렬왕 때 남홍보·남군보(南君甫)·남광보(南匡甫) 삼형제가 귀하게 되어 각각 영양군(英陽君)·의령군(宜寧君)·고성군(固城君)으로 봉해져 영양·의령·고성의 3본으로 분관하였다.
[입향 경위]
영양남씨로 영덕 지역에 입향한 사람은 남홍보의 8세손인 남수이다. 남수의 호는 송정(松亭)으로 울진에서 태어나 사헌부 감찰어사, 용담현령을 역임하였다. 이후 단종이 폐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 인량리에 정착하였다. 남수가 인량리로 이거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인량에 터전을 잡고 살던 대흥백씨 백린(白璘)의 딸과 혼인한 것으로 보아 혼인 후 처향으로 이거한 것으로 보인다.
남수의 후손들 중에는 충·효·학의 사표로서 불천위에 봉해진 난고(蘭臯) 남경훈(南慶薰)[1572~1612]이 현달하였으며, 그 외에도 많은 과거급제자와 학자를 배출하였다.
[현황]
영양남씨는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가산리, 영해면 원구리·묘곡리·괴시리[호지말], 축산면 칠성리, 병곡면 거무역리 등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2015년 인구통계에 의하면 영덕군 내에 거주하는 영양남씨는 724명으로 나타난다.
[관련 유적]
축산항에 남민의 유허비가 있다.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에는 영덕 영양남씨 난고종택[국가민속문화재]과 영덕 시암고택(盈德時庵古宅)[경상북도 문화재자료]이 있다. 또한 고택에는 『남종통기(南宗通記)』를 비롯한 고문서 12점[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역대 종손들의 문집을 모은 『영산가학(英山家學)』[경상북도 문화재자료]이 전해진다. 영해면 괴시리 호지말에는 영양남씨괴시파종택(英陽南氏槐市派宗宅)을 비롯한 고택과 정자 등 14점이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및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으며, 2021년에 마을 전체가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축산면 칠성리 화전[꽃밭]에는 남수의 묘소와 재실 송정(松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