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5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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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元邱里英陽南氏集姓村 |
영어공식명칭 | Single-Clan Village of Yeongyang-Nam Clan in Wongu-ri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1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창기 |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에 있는 영양 남씨 집성촌.
[개설]
영양남씨는 경상북도 영양군을 관향으로 하고, 남민을 시조로 한 성씨이다. 원구리 영양남씨는 15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남비(南秠)와 남한립(南漢粒) 부자가 입촌한 이후, 난고(蘭臯) 남경훈(南慶薰)[1572~1612]을 위시한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자손들이 번성하여 무안박씨, 대흥백씨와 함께 나란히 집성촌을 이루었다.
[마을입지]
영해면 소재지에서 영양 방면으로 통하는 지방도 제918호선의 2㎞ 지점에 있는 마을이다. 울티재에서 발원하여 송천강의 주류를 이루는 서천과 대동에서 발원하여 마을 앞을 돌아 송천강으로 합류하는 남천 사이의 삼각 지점에 중구봉을 등지고 자리 잡고 있다. 두 하천 주변에 펼쳐진 넓고 비옥한 농경지들이 주민들의 생활 터전이 되고 있다.
[명칭 유래]
원구(元邱)는 원래 으뜸 거북이란 뜻으로 원구(元龜), 둔덕진 곳에 있는 들이라 해서 원두들, 으뜸 언덕이란 뜻으로 원고(元皐, 元鼓), 넓은 들이라는 뜻으로 원파(元坡) 등으로 불렀다. 1895년 관제 개편 때 영해군 묘곡면 원구동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영덕군 영해면에 편입되었다.
[형성 및 변천]
원구마을은 조선 중기 이후 영양남씨, 무안박씨, 대흥백씨가 나란히 세거하는 마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영양남씨로 이 마을에 처음 입주한 인물은 종사랑(從仕郎)을 지낸 남준(南晙)[1474~1550]으로 알려져 있으나, 남준의 후손들은 6대쯤 살다가 마을을 떠났다. 지금 원구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영양남씨는 충무위 부사직(忠武衛副司直), 훈련원 참군(訓鍊院參軍)을 지낸 남비와 아들 남한립의 후손들이다. 남비와 남한립의 원구 입촌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남한립이 인량에 거주하던 무안박씨 입향조 박지몽의 딸과 혼인한 후 15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울진에서 원구마을로 이거한 것으로 추정된다. 남한립의 증손인 난고 남경훈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의병장으로 공을 세우고, 학덕과 효행이 널리 알려져 지역 유림에서 불천위로 모시게 되었다. 남경훈의 후손 중에서 8명의 문과급제자를 비롯한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지역사회의 명문으로 자리 잡았다.
[현황]
원구리에는 조선 중기 이후 500년 가까이 세 종족(宗族)이 나란히 세거하고 있는 전통이 근세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1930년에는 영양남씨 40호, 무안박씨 45호, 대흥백씨 31호, 기타 타성 35호로 세 종족이 공존하고 있으며, 2014년 5월 기준 총 97호 중 영양남씨 23호, 무안박씨 22호, 대흥백씨 22호, 기타 성씨 30호로 나타나고 있다. 영덕 영양남씨 난고종택[국가민속문화재]과 영덕 시암고택[경상북도 문화재자료], 그리고 영해난고종가문서[경상북도 유형문화재]와 역대 종손들의 문집을 모은 영덕 난고종택 영산가학 및 가고[경상북도 문화재자료]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