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826
한자 金仲圭
영어공식명칭 Kim Junggyu
분야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진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8년 2월 8일연표보기 - 김중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김중규 창수면 3.1독립운동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46년 5월 13일연표보기 - 김중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2년연표보기 - 김중규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김중규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창수면 3.1독립운동
거주|이주지 갈상동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리 지도보기
활동지 창수경찰관주재소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창수동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강점기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김중규는 1888년 2월 8일 태어났으며, 거주지는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갈상동[신리리]이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18일 오후 1시경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동 시장에서 정규하(丁奎河)·박의락(朴義洛)·남세혁(南世爀) 등에 의해 영해면 3.1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영해면 만세운동 소식은 다른 지역에도 전해졌다. 이에 영양의 이종구(李鍾龜)가 수십 명의 오촌동·삼계동 주민들을 이끌고 영해면 3.1독립운동에 참가하고자 영해로 출발하였다. 길상동과 신리동 주민들도 영해로 가기 위해 결집하였다. 마을 주민들이 신기동에 이르렀으나, 이미 신기동 주민들은 영해로 먼저 떠난 뒤였다. 이에 협의를 통하여 시간상 영해로 가는 것이 어렵다며 창수동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하였다.

3월 18일 오후 4시경 김중규를 비롯한 군중들이 창수동에 결집함으로서 창수면 3.1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몽둥이 등을 휴대한 약 200명의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창수경찰관주재소로 향하였다. 신리동의 권덕명(權德明)과 창수동 구장 김재수(金在守) 등이 큰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주재소를 부수라고 주창하였다. 김중규도 주재소에서 김계규·김응상 등 군중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이어 군중들이 주재소를 공격하고 사무실로 들어가 일경들의 대검을 탈취하려고 하자, 일경들이 황급히 도주하였다. 그러자 이수각·이현설 등의 지휘하에 군중들이 돌을 던지거나 몽둥이를 휘두르며 손·발로 건물·창·벽 등을 파괴하고 서류·장부·공문서·서적 등을 찢거나 사무실 밖으로 내던져 파기하였다. 또한 일경들의 총 3정과 대검 2개를 파손시켰다. 그리고 숙소의 담·굴뚝·벽을 무너뜨리고 기둥을 부수며 실내로 들어가 목욕장과 목욕장 솥을 망가뜨리고 의류·가구·이불·식기 등을 꺼내 파손시켰다. 김중규오만이(吳萬伊)·이기성(李箕聖)·신갑수(申甲壽) 등과 함께 돌을 던져 주재소 벽을 무너뜨렸다. 오후 7시경 주재소 등을 파괴한 후 군중들이 귀가하던 중 창수교에 이르러 일경들이 사전에 소유물을 숨겨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약 30명의 군중들이 뒤돌아가 장명술(張命述)·박만복(朴萬福)을 시켜 오용이(吳龍伊)·박석문(朴石文)·이강복(李康福)의 집을 찾아 습격하여 일경들의 소유물들을 파손시켰다.

창수면 3.1독립운동이 끝난 후 일경의 대대적인 검거작전에 시작되었고, 김중규도 체포되었다. 김중규는 4월 10일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에서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 공무집행 방해, 건조물 손괴, 기물 손괴, 공문서 훼기, 상해 및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상훈과 추모]

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