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붕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907
한자 南鵬
영어공식명칭 Nam Bung
이칭/별칭 양지(養之),운로(雲路),해주(海州),남호양(南浩養),남호직(南浩直)
분야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0년연표보기 - 남붕 출생
몰년 시기/일시 1933년연표보기 - 남붕 사망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 지도보기
묘소|단소 장등 -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삼화리 지도보기
성격 학자
성별
본관 영양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학자.

[가계]

남붕(南鵬)[1870~1933]의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양지(養之)·운로(雲路), 호는 해주(海州)로 처음에는 호양(浩養)·호직(浩直)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으나, 나중에 스스로 붕(鵬)으로 개명하였다. 남상소(南尙召)의 10대 주손으로 아버지는 남태진(南泰鎭), 어머니는 권석룡(權錫龍)의 딸 안동권씨(安東權氏), 조부는 남교영(南敎永), 증조부는 남정환(南鼎煥)이며, 부인은 백동기(白東基)의 딸 대흥백씨(大興白氏)이다.

[활동 사항]

남붕은 조부 남교영에게 처음 학문을 배웠다. 21세 때 김흥락(金興洛)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문하에서 이상룡(李相龍)·김형모(金瀅模)·이중철(李中轍) 등의 인사들과 교유하였다. 향시에는 응시하였으나 실패한 후 더 이상 과거 시험에 뜻을 두지 않았다. 1910년 나라를 잃고 상심하는 가운데, 1912년 아들 남원모(南元模)와 함께 한 동안 계룡산에 들어갔다가, 다시 고향 영해(寧海)로 돌아왔다. 1924~1926년 무렵에는 실업근면회사 설립을 추진하였다. 시대가 급변하는 가운데 주로 고향에서 유학 진흥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구봉서원(九峯書院)에서 강회를 열었으며, 향약(鄕約)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영해향교(寧海鄕校)에 중학교를 설립하려고 하자 고을을 대표해 강하게 반대하였다. 스승 김흥락의 언행록을 정리하였으며, 퇴계 성리학에 침잠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학문과 저술]

남붕은 유집(遺集)으로 『제식휘찬(祭式彙纂)』, 『창수귀감(創垂龜鑑)』, 『감성심록(鑑惺心錄)』 등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특히 남붕은 17세부터 48년 동안 일기를 작성하였는데, 현재 1922~1933년 사이의 일기가 전하고 있다. 『해주일록(海州日錄)』은 1920년대 영덕의 사회·경제상을 비롯해 급변하는 시기 보수 유림의 다양한 인식을 잘 보여준다. 의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묘소]

남붕의 묘는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삼화리 장등(長嶝)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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