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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1033
한자 河仁俊
영어음역 Ha Injun
이칭/별칭 택부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재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유생
출신지 경기도 용인시
성별
생년 미상
몰년 1618년연표보기
본관 진주

[정의]

조선 중기 용인 출신의 유생.

[개설]

17세기 초반 조선의 조정에는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적통론(嫡統論)을 내세워 영창대군을 세자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일전에 영창대군을 세자로 옹립하려던 유영경 일파가 몰락하고 대북정권(大北政權)이 들어섰다.

이들은 왕통의 취약성을 은폐하기 위하여 선조의 첫째 왕자 임해군을 제거하고 이어서 영창대군을 폐서인(廢庶人)시킨 뒤 살해하였다. 대군의 외조부 김제남도 사사시켰고, 인목대비도 폐비 시킨 다음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가계]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택부(澤夫).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 하영서(河永緖)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1612년 진사에 합격하였다. 1618년 인목대비가 서궁으로 유폐된 이후에 좌참찬 허균 등을 중심으로 폐모론이 제기되었을 때 경기도 용인 출신의 관학 유생이었던 하인준은 수백 명의 다른 관학 유생과 더불어 폐모론을 강력히 주장하는 상소를 냈다.

이후에도 인목대비의 폐모를 계속 주장하여 허균과 행동을 같이 하였다. 1618년 8월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격문 사건과 연루되어 하인준허균·현응민·우경방·김윤황 등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이 때 역모자가 살았던 경기도 용인은 법에 따라 읍호를 내리고, 당시 현령이었던 심영은 파직되었다.

그런데 용인 지역이 삼남 지방을 이어주는 요충지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이에 따라 용인에는 격을 낮춘 현감을 둠으로써 역모를 토벌하는 대의는 보이되, 고을 수령은 그대로 존속시키는 것이 옳다는 의견이 받아들여져 시행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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