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03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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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東大都護府 |
영어음역 | Andong-daedohobu |
영어의미역 | Andong-daedohobu Administration District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김호동 |
[정의]
1204년 안동 지역에 설치된 지방 통치 행정 기관.
[개설]
1018년(현종 9) 경상북도 경주에 설치하여 사(使: 정3품)·부사(정4품)·판관(判官: 정6품) 등을 두었고 1030년 경주가 동경(東京)으로 승격된 이후 대도호부를 안동으로 옮겼다. 충렬왕 때는 복주목(福州牧)으로 격하되었으나 1361년(공민왕 10) 공민왕이 홍건적(紅巾賊)을 피하여 이곳에 머물렀을 때 관민이 왕을 잘 모셨다 하여 다시 대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제정경위 및 목적]
안동대호부는 935년(태조 18) 경주에 둔 것이 처음인데, 시기에 따라 소재지의 변동이 있다. 경주는 대도독부로 승격되고 안동도호부의 위치는 상주(尙州)로 바뀌었다. 상주는 940년 상주로 불렸다가, 그 뒤에 고쳐 안동대도호부라 하였다. 983년(성종 2) 처음 12목을 둘 때에 다시 상주라 불렀다.
995년에는 김해(金海)를 금주안동도호부(金州安東都護府)로 하였는데, 이곳은 1012년(현종 3) 금주로 고쳤다. 같은 해 절도사를 폐하면서 다시 상주를 안동대도호부로 삼았다가 1014년에 상주에 안무사를 두고, 새로 경주를 안동대도호부로 삼았다가 1030년 경주에 동경유수를 설치하였다. 그 뒤 무신정권 때 안동부(安東府)를 안동도호부라 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안동의 고창 전투에서 삼태사(김선평·권행·장길) 등 지방 세력의 도움으로 후백제의 견훤을 격파한 후 안동부를 설치하였다. 안동은 그 후 영가군·길주 등으로 불리다가 1030년(현종 21)에 안동부가 되었다. 무신정권 때인 1197년(명종 27)에 남적으로 불리는 김사미·효심의 농민항쟁을 진압하는데 안동이 공을 세워 안동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204년(신종 7)에 동경 야별초 패좌 등이 농민을 규합하여 신라부흥운동을 일으켰는데, 안동에서 이를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이때 신라부흥운동을 진압한 최충헌 정권은 당시 경상도의 명칭인 경상주도를 상진안동도로 고쳤다. 신라부흥운동의 진앙지가 경주였기 때문에 경상주도의 명칭에서 ‘경’자를 빼고, 대신 항쟁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던 ‘안동’이란 지명을 넣어서 ‘상진안동도’라고 한 것이다.
[변천]
무신정권시대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된 안동 지역은 1308년(충렬왕 34)에 복주목이 되었다. 1361년(공민왕 10)에 홍건적의 침입으로 인해 안동, 즉 복주에 피난하였는데, 이곳 주민들이 정성껏 왕을 접대하였다고 하여 다시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의의와 평가]
고려와 같은 전근대 사회의 경우 국왕에 대한 군현의 충역에 따라 그 군현의 등급이 승격되기도 하고 격하되기도 한다. 이에 따라 해당 지방 세력의 중앙으로의 진출도 영향을 받는다. 안동 지역이 고려 태조 왕건의 편에 서서 후백제의 견훤을 격퇴한 이래 고려 일대에 걸쳐 안동 지역은 농민항쟁의 진압에 공을 세우는 등 친중앙정부적 성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군현 등급의 승격, 재지 세력의 중앙 진출의 반대급부를 받았다. 이로 인해 홍건적의 침입 때 왕의 피난지가 될 수 있었다.